[여름휴가]단종유배지 청령포로../15년8월3일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국가지정 명승 제50호 )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유배지가 되면서 청령포는 눈물과 한이
맺힌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현재 청령포에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단종어소와 영조의 친필이 음각된 단묘재본부시유지, 금표비,
천 년의 숲으로 지정된 청령포수림지,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관음송,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과
노산대 등 단종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이 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오후1시라서인지온도는 35도이상으로 습하기까지 하니
땀은 비오듯 흐르고 목은 마르고얼굴은 따가워 몇발짝만 옮겨도 힘이든다.
매표하고 우측 계단을 내려가서 줄을 서면 청령포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시간이 정해진건 없고 관람객이 있으면 두대가 왕복으로 오간다.
휴가철에다 주말이어서 관광객이 많아
뜨거운 햇볕아래 줄을 서야 하는 불편함도 감내해야 했다.
청령포에 도착하다.
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닿은 자갈길은 윤이 난다.
해변의 자갈밭을 지나면 바로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청령포는 국가지정 명승50호로 송림숲을 지나 단종어소, 관음송, 망향탑,
노산대, 금표비 순으로 돌아보면 되는데 한 시간 정도면 된다.
금표비(禁標碑)는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된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한다는 비석이다.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음각되어 있다.
즉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라는 뜻이다.
그 만큼 큰 제약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 후 단종은 유배 두달만에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잠겨
영월부사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으나
유배당한지 4개월여만에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한다.
동강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도 엄흥도가 수습하여
동을지산 중턱에 묻었다.
그후 단종의 묘는 59년이 지난 1516년 봉분을 갖추고
숙종때 이러러 단종으로 복위하고 무덤은 장릉으로 봉해졌다.
망향탑
단종이 해 질 무렵이면 한양을 그리워하며
시름에 잠겼던 노산대 가는 길에는 망향탑이 있다.
비인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소박한 돌무더기는
단종의 애절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추수려진다.
단종이 그리워하였던 두살 위의 정순왕후 송씨도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평생 영월 땅을 바라보며 한을 달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관음송 뒤로 데크를 올라가면 청령포 뒷산
육육봉(六六峯)과 노산대(魯山臺)가 있다.
단종은 깎아지른 절벽인 육육봉을 보고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관음송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이다.
크고 장대한 금강송으로 단종은 이 소나무 가운데 걸터앉아 쉬었으며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린다.
카메라에 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소나무는 수령 600년으로
높이30M이며 둘레 5M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단종을 시중하던 관노들이 머문 행랑채
단종어소 앞에는 1763년에 세워진 「端廟在本府時遺址」
단묘재본부시유지비가 있다.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이다'라는 글로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 있다.
단종어소로 향하여 가다보면 거송들이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모리를 조아리듯 기울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어린단종은 소나무가 두렵기도 했지만 위안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종어소가 가까워질수록 담 너머로 유난히 어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일명 충절의 소나무로 불리며 "엄흥도소나무"라고 한다.
엄흥도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는
엄명에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단종어소
단종의 유배처인 단종어소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본채와 궁녀와 관노가 기거하던 행랑채가 복원되어 있다.
본채에는 유배를 짐작하게 하는 당시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어가 처마밑에는 어린 단종이 직접 썼다는 한시가 적혀 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항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숲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로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단종과 엄흥도
단종이 죽자 그 시신을 영월의 동강 물줄기인 청령포에 던진다.
누구든 단종의 시신을 건드리거나, 건져 올려 묻어줘도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
많은 백성들은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목숨이 두려워 발만 굴릴 뿐..
그 때 영월현 아전으로 있던 엄홍도라는 사람이 밤중에 단종의 시신을 건져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어주고, 온 가족을 데리고 도망을 간다.
그 뒤로 엄홍도의 가족과 그 후손들은 대대로 자신들이
누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그런데, 어느 화가의 전시회 그림속에 엄홍도가 청령포 소나무 뒤에서
단종의 시신을 바라보는 모습,
지게에 지고 가는 모습 등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고,
엄홍도라는 이름도 떳떳하게 밝혔다.
그 내용이 텔레비젼 뉴스에 나가자, 그 뉴스를 본 후손이 찾아 와 한을 푼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후문도..
장릉(莊陵)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사적 제196호)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다.
계단을 올라 능선을 걸어서 단종릉에 도착한다.
한낮의 햇볕은 쨍쨍..!!
무인석도 없고, 병풍석도 없고 왕릉이라고 하기엔 초라해보이기만 한다.
버들골에서의 추억..
-횡성근 청일면 유동리-
35도를 오르 내리는 폭염속에서 여행이라는건..
여간한 고행이 아니다.
그런데 이동중에 뒤차로 따라오는 헬로님한테
수박 먹고가자는 전화가 온다.
목이 마르고 땀이 흘러 내리는 이곳 유동골길목에서
먹는 수박맛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이 옥수수는..!
내자 친구 원주에 사시는분이 우리일행이 늦게 도착하는 바램에
만나지도 못하고 콘도에 맡겨 놓고 갔다.
이렇게 맛있는 옥수수를 오랜만에 먹어 봤다는 친구들의 말들..
어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묻어남으로써 더더욱
맛있었던게 아니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