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있는오솔길/이런저런모임

용인 백암마을 친구따라 간길../17년4월29일(토)

가잔티 2017. 4. 29. 22:10

 

 

 

 

친구들덕에  용인지역을 두루두루 돌아..

 

집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지만

왠만해서는 선뜻 가보겠다는 결단이 서지 않았는데..

 

백암님 초청으로 후한 대접까지 받으면서 일곱가족이

"정몽주선생의 묘"부터 투어를 시작하여,

 "와우정사"를 둘러보니 오전이 다 간다.

 

백암면에 있는 "건강사철탕"에서 오찬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한택식물원"을 한바퀴 돌아 

 백암님생가와 선산에서 산나물등을 채취하니 꽉찬 하루다.

 

 

 

 

"정몽주선생 묘(鄭夢周先生 墓)"를 참배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1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능원리)에 있다.

 1392년(공양왕 4) 순절한 뒤 풍덕군에 묘를 썼으나,

 뒤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묘를 옮기기로 하고,

 이장하던 중 그 행렬이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앞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 사모지붕 비각 내에 서향(西向)으로 안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1696년에 세웠고,  1699년에 기록을 하였다.

방부의 비신 세우는 곳에 3단으로 층계를 마련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개석의 처마곡선 양끝을 경사지게 올린 것이 특징이다.

총높이는 약 388㎝로 비신 높이는 238㎝, 너비는 89㎝, 두께는 39.5㎝이다.

 

참배하기전에 쑥이 지천이라..

 

 

 

 

 

 

 

 

 

 

기념물 제1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능원리)에 있다.

1392년(공양왕 4) 순절한 뒤 풍덕군 공동묘지에 묘를 썼으나,

뒤에 태종의 명으로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묘를 옮기기로 하고,

이장하던 중 그 행렬이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앞의 명정(銘旌)이 회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명당인 것을 알고 안장하였다고 한다.

 

 

 

 

 

정몽주 묘역 입구에는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일가의 묘비가 있다.

 

 

 

 

 

 

 

 

 

 

 

 

 

 

 

 

 

 

 

 

 

 

 

 

 

우리나리 묘역에서는 보기 힘든 연못으로 음양의 이치에 따라

 가운데 섬을 두었으나 연지의 모양이 정방형이 아니라 삼각형인 점이 특이하다.

 

 

 

 

일화로 이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정몽주의 손녀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밤새워 연지의 물을 퍼다가 이 자리에 뿌렸는데

 

다음날 묏자리를 파보니 물이 많이 나와 정몽주의 후손들은

옆에 있는 지금의 정몽주 묏자리로 바꾸었다는 전설..

 

그덕분인지 이석형의 연안이씨가문은 번창하여

달성서씨, 광산김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문가문이 되었지만

정작 정몽주의 후손들은 그다지 번성치 못하였다는..

 

 

 

 

 

 

 

 

 

 

 

 

 

 

 

 

 

 전사청인 모현당(慕賢堂)은 2003년에, 

 2005년에는 관리사인 경모사(敬慕舍)는 2005년에 신축하였다.

 이곳의 제사는 일년에 7번을 지낸다고 해설사가 알려준다.

 

 

 

 

 

묘비는 1517년(중종 12) 묘를 수축할 때 세운 것으로,

 비에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왕조 때 주어진 시호를 기록하지 않았다.

 

묘표의 비신 앞면 중앙에는 한 줄로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음기를 각자하였다.

 

 

 

 

단분으로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곡담 등은 종전의 것이 남아 전해져 왔다.

그런데 1972년 5월 문화재로 지정된 후,

같은 해 12월 종전의 상석이 지금의 것으로 교체되어, 원형이 일부 훼손되었다.

1974년 12월 곡담을 보수하면서, 장명등, 망주석, 석양, 호석, 난간석,

 그리고 별도의 새로운 문인석 1쌍 등이 추가, 설치되었다.

 

 

 

곡담을 돌로 쌓는 형태는 왕능에서나 볼 수 있는데

정몽주선생의 묘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태종 이방원이

조선을 바로세우고자 하는 정신을 볼 수 있다.

비록 조선 건국을 찬성하지 않아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타살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누구든 나라에 충성하면

 이만큼 대우를 받을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