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잔티 2020. 10. 27. 06:56

 

 

안석경(1718-1774)은 홍천·제천·원주등 청년기를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하였고 1752년(영조 28)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霅橋集)』·『삽교만록(霅橋漫錄)』이 있다.

후설악기(後雪岳記)                                                                                                                                     안석경(安錫儆)

설악(雪岳)의 유람은 낙산사(洛山寺)에서 시작하였다. 낙산(洛山)은 설악의 산기슭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에 이르고, 오른편 지맥(支脈)은 완만하다.  펑퍼짐한 비탈에는 많은 나무들이 울창한 속에 동해묘(東海廟)가 있다.  동해묘(東海廟)를 지나 북쪽 수리쯤 가다가 작은 언덕에 오르면 동해(東海)가 내려다보이는데  바닷물은 출렁이고 하늘은 끝이 없다.

남쪽을 보면 수많은 소나무가 띠를 두르고, 밝은 모래밭 서쪽을 쳐다보면 설악(雪岳)의 큰 형세가  하늘을  버티고 있는 듯하다. 돌아서 북쪽으로 1천여 보 들어가면 절이다. 절은 높은 곳에 의지하고, 멀리 숲 우거진 언덕을 안고 있다.

의상대                                                                                                          홍련암

 

단청한 누각(樓閣)은 거듭 겹겹으로 큰 물결에 얼비친다. 빈일료(賓日寮) 이화정(梨花亭)은 바닷물이 제일 많을 때는 술자리를 깔아놓은 듯하다. 창이 있는 쪽을 따라 동쪽으로 수 백보 내려가다 의상대(義相臺)에 올랐다. 의상대(義相臺)는 즉 거석(巨石)이 바다에 꽂인 듯 절연(截然)한데, 소나무에 의지하여 앉으면 보이는 것들이 호연(浩然)하다. 북쪽 아래 백여 보에서는 관음각(觀音閣)에 들었다. 관음각(觀音閣)은 서쪽 절벽에 의지한 채 동쪽으로 걸쳐졌으며, 깊은 굴은 굴속으로 바닷물을 들이켰다 토하는데, 세차게 내달리며 쇠북 치듯 진동하여 자리 밑은 항상 시끄러워 놀라기 일 수다. 창을 열면 3면에서 바다 물을 고래가 뿜어대듯 뿌려대고. 이무기가 울어대며 마룻대와 들보까지 침범함으로 잠시 들렀다가 돌아와 앉았다. 이화정(梨花亭)이 아니라 이화정(梨花亭)이 있는 배나무 밑이었다. 선인(仙人)들은 일찍이 말하기를 이화정(梨花亭)에서 일출을 보면 매양 경경(耿耿)하다 하였거늘, 매양 생각은 갖고 있으면서도 못난 이 사람은 백발이 되어서야 와보니 철쭉은 아쉽게도 져버렸으니 어찌 마음인들 서글프지 않으리오.

이윽고 남쪽으로 나가다 서쪽으로 바다를 곁하고 북쪽으로 가면 명사십리(明沙十里)에 해당(海棠)화가 활짝 피었다. 서쪽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계곡은 곧 큰 산에서 나오는 것이다. 20리를 나아가면 장항(獐項)이라고 하는데, 큰 산 밖에 있는 산이다. 남쪽으로는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가 보이는데, 그 길이는 수천 길이 된다. 넓은 절벽을 가르며 비스듬히 떨어지는데, 그 반만 보이고 반은 산기슭에 가려있다. 또 가뭄에는 그 흐름이 성(盛)하지 않음으로 모두가 애석해 한다. 그러나 번쩍번쩍 빛나는 좌우의 석봉(石峯)이 화살촉처럼 모여들어 유인(遊人)들을 즐겁게 하고 시원스러움에 다시 보게 된다.

토왕성폭포                                                                                                신흥사

 

몇 리를 가서 신흥사(新興寺)에 들리고 북쪽 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십리쯤에서 계조굴(繼祖窟)에 들렸다. 굴(窟)은 천후산(天吼山)을 등지고 있다. 이 산은 순전히 돌을 예쁘게 깎아 놓은 듯 하다. 광심(廣深)은 5백 방(方)이고 높이는 2백 잉(仍)으로 푸른 비단 병풍을 펼친 듯 하며, 저녁 햇빛을 받으면 흔들리는 것 같아 이채롭다. 굴(窟)은 큰 돌 아래 얕은 곳에 있는데 흡사 승방(僧房)의 감실(龕室) 모양이고, 감실(龕室)을 새로 수리한 듯이 좌우가 모두 막혔다. 돌 앞에는 석문(石門)이 있고, 석문(石門) 앞에는 넓은 암석이 있는데 폭이 10여 장에 이른다. 바로 천후산(天吼山)을 마주하고 있으며 위에는 입석(立石)이 있다. 할아버지 죽애공(竹涯公)께서 제명(題名)을 정중하게 받들어 새겨놓은 자취가 남아 서글픈 생각이 새롭기만 하다.

서남쪽으로 3 리를 내려오다 내원암(內院庵)에 들렸더니 청유(淸幽)함이 애잔하여 돌아와 신흥사(新興寺)에서 묵었다. 절 동북쪽은 달마봉(達摩峰). 향로봉(香爐峰) 여러 석봉(石蜂)과, 남쪽으로 보이는 권금성(權金城)과 많은 석봉(石蜂)들이 겹겹으로 쌓여 달이 떠도 빛을 가리고, 미풍은 이상하리만큼 허리나 두를 뿐이어서 밤에 목욕을 했다.

와선대                                                                                                          비선대

 

새벽이 되어 계곡을 거슬러 오르려니 서쪽 5리 와선대(臥仙臺)의 수석(水石)은 조금씩 뛰어나고, 또 5리는 비선대(飛仙臺)로 예부터 식당암(食堂岩)이라 하였으며, 큰 골짜기의 창연한 돌 모두가 바닥이 되고 언덕이 되어, 물가는 높거나 낮고, 구부러졌나 하면 곧바르고, 험하거나 평탄하고, 좁기도 하고 트이기도 하며, 다른 산 여러 골의 물을 받아드린다고 했다. 맑은 물이 두루 그곳으로 흘러들며 폭포와 여울을 만들고, 그로 하여 물결과 거품을 만들기도 하고, 머무르며 소용돌이치다가 소(沼)를 만들고, 출렁거리며 잔물결도 만들고, 구름과 아름다운 노을에 잠긴 햇빛이 비추면 산은 모두가 그 자태를 뽐내니 고금에 인간과 신령이 화락함이리라.

금강굴                                                                                                           달마봉

 

북쪽에 높이 솟은 것은 금강굴(金剛窟)이다. 대 여섯 개의 석봉(石蜂)들이 위태로운 모양으로 내려다보인다. 굴은 큰 봉에 있으며, 남쪽에 세 네 개의 험준한 석봉(石蜂)과 대치해 있다. 아래로 보이는 달마봉(達摩峰)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봉들은 동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위쪽의 모든 석봉(石蜂)들이 겹쳐져 햇빛은 들쑥날쑥하다. 서남쪽 깊은 골짜기는 입을 벌린 듯이 깊이 트였으며, 석봉(石蜂) 10여개는 귀신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데, 조용히 깊은 곳으로 피해 늘어섰다가 갑자기 내달리어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사방 주변은 풀과 나무들이 구름 모여들듯이 펼쳐졌다. 향기는 짙은데 철쭉은 지려고 하고, 목련꽃이 한창이라 잠간 쉬었다.물가 푸른 언덕에서 위로 3 리를 저항(猪項)이라 하는데 험하기 그지없고, 또 5 리를 마척(馬脊)이라 하는데 대단히 가파르다. 또 3 리를 지나면 허공교(虛空橋)로, 다리는 두 개의 나무를 벼랑에 건너질러 놓아 위험하고 아찔함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조금 앞에 보이는 천 길의 렴폭(簾瀑)은 양 석봉에 끼여 시원스럽고 세차게 흐른다. 물을 거슬러 2 리를 오르면 보문암(普門菴) 옛터가 있다. 보문암(普門菴) 앞으로는 만경대(萬景臺)에 오르는데, 예전에는 향로암(香爐岩)이라 불렀으며, 향로암(香爐岩)은 가파르고 시내가 위태롭다고 했다. 위는 평원으로 좌우로 석봉(石蜂)을 볼 수가 있다. 백여 개의 바위와 요석(腰石)은 털끝 같으나 모두가 수 십 길 정도로 놀랄 만큼 특출하다.  동쪽으로는 바다와 청초호(靑草湖) 영랑호(永郞湖) 여러 호수가 보인다. 보문암(普門菴)에서 벼랑으로 6. 7 리 오르면 비로소 고개 등성이가 시작되는데, 우뚝 솟은 상설악(上雪岳)의 초입새다. 지금은 중설악(中雪岳)이라고 하나 이름이 명백하지 않으니 마땅히 옛것을 따라야 한다. 앉아서 바라보니 산 안과 밖의 많은 석봉(石蜂)이 머리를 다투며 모여들고,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호수와 바다는 시원스럽다.

 오세암                                                                                                                         만경대

 

 이곳에서 서쪽을 산내(山內)라고 한다. 푸른 절벽 아래 5. 6 리에 두 개의 대(臺)가 있어 세폭(細瀑)을 볼 수 있다. 또 3. 4 리에서 오세암(五歲菴)에 들리게 된다. 오세암(五歲菴)은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이 예전에 머물던 곳이나, 새로 고친 빛이 완연하다. 좌우와 앞뒤로 석봉(石蜂)이 트이고, 빽빽하게 나무들이 둘러 있어 특이한 흥취가 있다. 암자는 흙 둔덕 머리 편안한 곳에 지었으며, 또 돌에 엉겨있는 물가에 이르면 그 높이가 2천 길이다. 암자에는 매월옹(梅月翁)의 화상(畵像) 두 점을 모셨는데 하나는 유상(儒像)이고 하나는 석상(釋像)으로 수염이 더부룩하게 나 있다. 나는 손을 씻고 의복을 갖추어 절을 올렸다. 우러러보니 우뚝한 풍모와 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높은 이마와 굳센 광대뼈, 힘찬 눈썹과 빛나는 눈, 오뚝한 코와 무성한 수염은 참으로 영웅호걸의 외모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건데 한(恨)이 응어리로 남아 오랜 세월에도 풀리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바야흐로 단종(端宗)이 왕위를 양보하자 육신(六臣)은 임금을 따라 죽었다. 매월당(梅月堂)은 비록 이미 머리를 깎고 세상을 피해 궁벽한 산에서 늙어갔으나 아직도 빛남이 있으니, 드러나는 것을 깊이 숨기고 헤아리면서 채미가(採薇歌) 일절(一節)로 스스로 만족하면서 그치려고 하지 않으셨음인가?.

서남쪽 1 리에서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다. 만경대(萬景臺)의 높이는 30길이며 천 백여 개의 기봉(奇峰)으로 둘려 쌓였으며, 동쪽으로는 요연(窅然)한데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폐문암(閉門岩)은 유연(幽然)함이 있고, 특별히 멀리 보이는 것은 가야굴(伽倻窟)이다. 가야굴(伽倻窟) 위로 십여 개의 봉우리는 깃털같이 서있고, 곱사등 같기도 하다. 가다가 흘깃흘깃 보니 저녁 햇빛이 선회(旋回)하며 따라오는 것 같아 암자에서 묵었다. 달이 소나무 울타리 위에 떠서 어슴푸레 한데 매월옹(梅月翁)이 생각났다. 매월옹(梅月翁)은 일찍이 검동(黔洞)에 사셨으며, 검동(黔洞)은 중설악(中雪岳) 남쪽이라고 한다.

수렴동계곡                                                                                                            쌍룡폭포

 

아침에 일어나 서쪽 5리 계곡물이 합치는 곳에 이르러 폐문암(閉門岩)을 포기하고, 물길로 수렴동(水簾洞)으로 들어갔다. 수렴동(水簾洞)의 깊이는 30여 리이며 좌우 모든 돌들이 가파른 봉우리를 만들고 절벽이기도 한데, 그것들이 서로 열리고 닫힘이 수없이 반복되어 헤아리기 어렵고, 양간(兩間)에 물은 구불구불하거나 꺾이고, 모였다가 흩어져 하나같이 고르지 않을뿐더러, 흐르다가 늘 그렇듯이 돌 틈을 만나면 느리고 급하게 흐르거나 길고 짧게 흐름이 하나같지 않다. 그곳은 모두 높은 곳에서 쏟아 붓거나 왕왕 허공에 매달리어 아래로 폭포를 만드는데, 넓은 곳에서 수렴(水簾)을 만들고, 이를 받아들여 모아 담담한 연(淵)을 만들기도 한다. 그 수 또한 알 수 없으나, 번갈아들며 먹빛으로 포개지고, 푸른 옷을 걸치고, 구슬을 뿌리고, 구슬이 샘솟고, 무지개가 뜨고, 눈이 춤추고, 햇빛에 반짝이기도 하며, 변함이 푸르고 붉고, 바람을 다스려 회오리바람도 말끔히 잠재우는 듯하다. 기회가 된다면 2십리를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가 진동하는 온 산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싶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

 

아래 돌에서 봉정(鳳頂)에 이르는 움푹하고 쓸쓸한 십여 리는 점점 좁아지며 오그라들다 높은 곳에서 끊어지는데, 길가에는 세 개의 폭포가 이어지면서 세 개의 웅덩이를 관통하여 흘러옴에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라움에 여유가 없다. 그 꼭대기에 오르면 확 트여 휑하다. 구름 걸린 봉우리는 사방으로 열리고 흰 돌은 텅 비어 푸른 물만 출렁거린다. 쳐다보면 두 개의 폭포가 돌산 쪼개진 틈새에 끼인 채 각기 섞이지 않고 벼랑으로 하얗게 공중에서 떨어지는데, 성난 바람에 펄럭이고, 서리와 우박을 아우르기도 한다. 담(潭)은 성난 용이 유연(洧淵)에서 다투어 목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칼이 날아가 연진(延津)에서 만나듯 처음에는 떨치듯 하더니 마지막엔 시원하고 조용하다. 두 폭포의 물은 넉넉히 쏟아지며 하나가 된다. 그 하나는 서남쪽 골짜기에서 오는데 길이가 백여 장이고, 그 원류 또한 2폭 2담이 모이고 모여 구슬을 꿰놓은 것 같아 볼만 하다. 그 위로도 10폭 10담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경사가 심하여 찾아 갈 수 없다고 한다. 그 하나는 동남쪽 골짜기에서 오는데 길이가 80여 장이고, 그 원류는 듣지 못하였으나 뛰어남이 있다고 한다.

봉정암                                                                                                  

 

조금 거슬러 올라가다 골짜기를 버리고 벼랑을 지나쳐 5 리쯤 가니 봉정암(鳳頂菴)이다. 큰 산의 3분의 2쯤 되는 높은 곳에 암자를 지었다. 암자(菴子) 뒤편 산등성은 기암이 줄을 지어 서있으며, 그중 하나는 봉(鳳)이 머리를 든 것 같다하여 예부터 이름이 봉정암(鳳頂岩)이라고 한다. 봉정암(鳳頂菴)의 여유 있는 곳은 탑대(塔臺)라 한다. 탑대(塔臺) 이외에 또 솟아오른 기이한 바위가 백여 개쯤 되는데 계곡이 합쳐지는 곳에서 그친다. 탑대(塔臺)에 오르면 내외의 산들이 기이하게도 변하는 것이 아홉에 일곱이다. 부처님의 머리와 신선의 얼굴이 희미한 남기와 맑은 노을 속에서 겨루듯이 뛰어나다. 동해의 바람과 파도가 산을 올라 탈것만 같아 뒤돌아 들어와 봉정(鳳頂)에서 쉬면서 시원한 물과 자지(紫芝)를 먹었다.

뒤 산등성이를 따라 동남쪽으로 10 리를 가서 청봉(靑峰)에 올랐다. 청봉은 매우 높아 해송(海松)과 측백(側柏)은 모두 강한 바람에 꺾이거나 쌓인 눈에 눌려서 휘감기거나 굽어진 채로 깔려있는데, 높이는 겨우 한자정도로 산을 푸르게 덮고 있어 잔디를 심은 마당 같다. 한 여름에 두견(杜鵑)이 피기 시작하여, 꽃으로 수놓은 듯 어지러워 가장 볼만 하다. 오래도록 앉아서 정상 주위의 산 안과 밖을 살펴보노라니, 동남쪽으로 솟아오른 중설악(中雪岳)이 공중으로 높이 솟아 큰 봉우리와 한 산을 이루었다. 서북쪽은 봉정암(鳳頂菴)과 오세암(五歲菴)이 있는 곳이고, 서남쪽으로 보이는 곳은 한계(寒溪)의 빼어난 봉우리를 아우르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보문암(普門菴)이 있던 곳으로 광활한 바다와 양 호수로 뒤덮이고, 이에 만여 개의 기봉들은 춤을 멈추고 일어서며 운도(雲濤)를 껴안은 듯이 보인다. 노을을 걸친 나무들은 빛나고, 저물녘 햇빛에 잠기는 춘록(春綠)도 빼어나니, 곧 본래부터 중후함을 지키고자 새기어 꾸몄음이요. 곧 본래부터 확실하게 자신을 뽑냄이라. 곧 그런 연유로 정실로 옛 부터 취함이요. 곧 축적하였음이라. 비록 모두가 탁월하여 나무들 스스로가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않음이라. 크거나 작거나 높거나 낮은 것들이 머리를 모으고 중악(中岳)을 향해 둘러쌓으니 우정(虞廷)의 상서로움을 모아 만방이 고루 화목함이요. 목야(牧野)에서 창을 세우고 일어선 일천여 무리의 엄숙함이라 주저하며 크게 숨을 쉬었다.

앞으로 5.6 리를 가서 중설악(中雪岳)에 올랐다. 이곳은 몸을 솟구치는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 생각하건데 상설악(上雪岳)을 어찌 제일 높다고 하지 않으며 또 옛 이름을 따름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보이는 청봉(靑峰)은 예서 더 높기가 수 백 길로 양양(襄陽)에서 들어오자면 바닥에서 수직으로 30 리라고 한다. 사방을 둘러보니 텅 비어 가리키며 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북쪽으로는 금강산(金剛山)을 당기고, 남쪽으로는 오대산(五臺山)을 어루만지며, 동쪽으로는 큰 바닷물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하늘과 태양만 우러를 뿐이다. 청봉(靑峰)에서 오는 길에 청봉(靑峰) 동남쪽에서 잠시 쉬었다. 마침 지전(芝田)에 자경(紫莖)의 푸른 잎이 번번하기에 뜯어가지고 돌아와 봉정(鳳頂)에서 잤다. 마침 15일이어서. 섬돌에는 달빛이 가득하고 봉우리와 골짜기를 살펴보니 나무와 돌이 맑고 삼림도 새로워 읊조리며 보느라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 머리 빗고 양치질 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다.

또 다음날 신묘(辛卯)일은 송천(宋泉)으로 점을 쳐 대장(大壯)괘를 얻었다. 늦게야 탑대(塔臺)를 넘어가 대장암(大藏嵓)을 보았는데, 대장암(大藏嵓)은 책을 쌓은 듯 하다하여 예부터 부른 이름이라고 하며, 또 구비치는 계곡으로 가야굴(伽倻窟)을 지나서 폐문암(閉門岩)을 보고자 하였으나, 물길을 따라 내려가자니 으슥하고 어두워 시름겹고, 다시 머물 곳을 찾아 벼랑길로 장장 2십 리를 가다 오세암(五歲菴)에 들려 잠간 쉬었다.

영시암가는길                                                                                                 영시암

 

  앞으로 가다 이른 곳은 계곡이 모이는 곳인데, 이곳은 수렴(水簾)과 폐문암(閉門岩) 양 계곡이 합쳐지는 곳이다. 따라 내려가노라면 수석(水石)이 역시 많고 기이한데, 5리에 이르면 영시암(永矢菴)이다. 영시암(永矢菴)은 얽어놓은 채 다 끝내지 못하였는데, 삼연(三淵) 김선생이 지은 것이라 한다. 서쪽으로 냇물을 건너서 보니 선생의 영시암(永矢菴) 옛터에 비석(碑石)과 완심정(琓心亭) 무청정(茂淸亭) 모두가 있는 곳을 알 수가 없다. 동대(東臺)가 홀로 있는 곳은 운목(雲木)이 유울(幽鬱)하고 천석(泉石)이 슬피 울어도 깨닫지 못하고 창연히 오래도록 헤매기만 하였다.   바야흐로 선생은 집안의 어려움을 만나 세상일을 끊고 스스로 산골짜기에 숨어 주옥같은 시와 주역(周易)을 외우며 즐겼으니, 누가 풍운지지(風雲之志)의 뜻을 접고 호해(湖海)의 쓸쓸함을 겸허히 받아 드림을 알았으랴. 단지 빙옥(氷玉)의 지조(志操)와 은하(銀河)같은 문장을 볼 뿐이다. 이제라도 만생(晩生)은 뒤늦게나마 와서 보니 한이 없고, 시를 배우고 주역(周易)을 익힌 선생께서는 대학자이심에도 터만 남아 있으니 사당(祠堂)을 세우고 서원(書院)을 설립하여 온 사방의 배우려는 자들을 오게 해야 한다. 이 땅은 산속의 최고 넓은 평지에 있으며 산수가 빼어나기란 열 곳에서 두세 개에 불과한 곳이니 진실로 헛되지 않으리라.

백담사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 세 차례 기이한 곳을 보고, 백담사(百潭寺)에 들렸다. 절에서 거처하기에는 넉넉하나 사방으로 보기에 기이함은 없고 오묘한 이치 속에 홀로 있으면서 심상하니 스스로 기이하다 할 수 있다. 점심을 먹고 작은 고개를 넘어 물 곁으로 가노라니 여울과 돌이 많아 기이하고, 5리쯤의 학소벽(鶴巢壁) 아래는 매우 뛰어났으며, 5리를 더 가면 지음허(知音墟)로 또한 심히 기이하다. 5리를 가니 백전동(栢田洞) 또한 매우 기이하고. 3리의 광암동(廣岩洞) 역시 매우 기이하며, 3리를 더 가면 오봉(五峯) 두타담(頭陀潭)이 또한 매우 기이하였다. 쌍봉(雙峰)은 돌문인양 물을 끼고 대치하였으니 어찌 설악(雪岳)의 문이라 하지 않으랴. 하여 이름은 곡백담(曲百潭)으로 근원이 청봉(靑峰)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대개 근원에서 갈역(葛驛)에 이르려면 70리 길이고, 설악(雪岳)의 갈역(葛驛)에서 합강정(合江亭)까지는 60리라고 한다.  좌측으로 설악(雪岳)을 곁하여 가는 길에는 흰 돌에 맑은 여울이라 130리가 설악(雪岳)과 분리 할 수가 없으나, 그 담(潭)과 쓸쓸한 산모퉁이는 백년이 다되었구나. 그 중 큰 산에서 흘러 두타담(頭陀潭)에 이르는 60여 리는 백곡(百谷)이 잇달아 모여들어 여울이 되고, 많은 벼랑과 돌이 갈마들어 냇물이 합쳐지고 흩어지며, 애석(崖石)이 점차 쇠하자 물도 따라 느긋하다. 여유를 부리며 흐르는 물은 점점 많아지면서 산에 부딪친다. 그러면서 잔돌이 많은 산은 부족하다고 무리하게 침범하여 부딪치고 쏘아대며 분탕질 하고는 달아나는 기세가 양극(兩極)이라 서로가 양보할 여유 없이 다툰다. 돌이 이기면 물을 경사지게 하고, 물이 이기면 돌을 에워싸 흐르며, 하나의 여울과 하나의 못이 끝날 줄 모른다. 백담사(百潭寺) 아래로 돌은 줄어들어서 더욱 셀 수 있고, 물은 부딪치면서 더욱 굳세다. 험한 돌 사이를 꿈틀거리며 가는 것은 달아나다 부딪치고 막혀 끊어지니, 세차게 일어나는 것은 성내며 으르렁거리고 물보라를 뿜어낸다. 놀라며 뛰어오르고 옆으로 기우는 것은 부딪치며 넘어지고 쓸면서 문지른다. 두려워하며 뒷걸음질치고 쓰러지거나 쓸리는 것은 차올랐다가 펼쳐진다. 멀리 물리치고, 밑에서 밀치며 매만져 보호하고, 쉬지 못하게 하면 날아오르거나 천천히 돌면서 맑게 흐르다 멈춰 고인다. 돌은 구비를 쫓으면서 뛰어나고, 물은 돌을 쫓으면서 수 없이 변하니, 그 모양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2리 정도 내려가면 산이 열리고 물은 완만해지기 시작하며, 비로소 평원이 보인다. 영취사(靈鷲寺) 터를 지나노라면 금강담(金剛潭)의 수석이 기릴 만하다. 3리를 더 가서 갈역(葛驛)에서 잤다. 역(驛)은 계곡 북쪽 기슭에 있고, 연옹(淵翁)의 옛터는 남쪽 기슭에 있다. 시내는 미수령(彌水嶺)에서 오는 물이 곡백담(曲百潭)으로 들어와 큰 냇물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따라 내려가는 10 리에는 물이 깊고 많아 볼만하다. 남교(藍橋)를 지나 5 리를 가서 신애(新崖)를 따라가니 신애(新崖)는 물과 가까이 있고 감상할 곳이 더욱 아름다운데, 벼랑을 돌아 관로(官路)를 버리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 용두담(龍紏潭)을 보니 돌은 여러 곳에 우뚝 솟아 험함으로 좌우로 물이 흩어지거나 출렁거리고 깔아뭉개거나 타고 넘는 것이 아주 볼만하다. 가장 큰 돌은 물로 들어가는 거북이가 목을 끌어들이는 것 같고, 바람과 물결이 침식하여 그 자취가 용이 서려있는 것 같다하여 옛적부터 불러온 이름이다.

  담(潭)에서 5 리를 가면 고원통(古圓通)이다. 상류에는 큰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냇물에 가득한데, 큰 새 같고 괴수가 웅크린 것도 같은 것이 백여 개다. 푸른 물은 종횡으로 모이고 흩어지며, 간간이 맑은 물은 흩날리고 흰 물은 솟아올라 요란한 물소리가 10 리에 가득하다. 냇물을 건너 점심을 먹고, 와천(瓦川) 남쪽으로 거슬러 오르다 한계동(寒溪洞)에 들어서니 20여 리가 운송(雲松)이고, 물이 넓고 깊은 곳에는 수석(水石)이 있는데 옥류천(玉流泉)이 으뜸으로 기이하다. 옥류천(玉流泉)은 양쪽 절벽사이에 매달려 흐르다가 폭포를 만들고 다시 웅덩이가 되는데 길이가 백여 장이며 희고 깨끗하여 사랑 할만하다. 10리를 가서 한계사(寒溪寺) 터를 지나 전(田)씨 집에서 잤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푸른 벼랑길로 7.8리를 가서 돌산등성에서 대승폭(大乘瀑)을 보노라니 거대한 절벽이 우뚝 솟은 곳에서 급류가 날리면서 떨어지는데, 천 길쯤 된다. 오랜 가뭄 탓에 흐르는 물이 넉넉하지 않으나 오히려 큰 비단〔匹練〕같다. 처음에는 성하게 콸콸 쏟아지다가 아래로 내려오다 흩어지며 부서져 빗방울이 되고, 시원한 눈꽃처럼 내리기도 한다. 반쯤 내려오다가 햇빛을 받으면 현란한 노을빛 무지개가 뜨고, 온풍이 불면 연기처럼 아지랑이가 떠 영롱하고, 빙빙 돌면서 춤추듯이 내려오기도 하고 안내려오기도 한다. 잠시 보고 있노라면 아래서 울림소리만 천천히 올라옴으로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만약에 많은 비가 내리면 그 위용이 대단하여 볼만하다고 한다.

대승암(大乘菴) 옛터를 지나 폭포의 원류를 건너서 만경대(萬景臺)에 이르면 동북쪽으로 대승암(大乘菴) 뒷 고개가 보이는데, 곧 백담사(百潭寺)의 서남쪽 산등성이다. 많은 석봉들이 숲의 안개 속에서 층지어 일어난다. 고개를 쫓아 동남쪽으로 가장 높은 곳 석봉(石峯)들 모두가 한군데 모인 것을 하설악(下雪岳)이라고 한다. 남쪽의 오색령(五色嶺)을 보면, 령의 상하좌우 모두가 석봉(石峯)이다. 진목전(眞木田)은 북쪽에 있다. 10 리가 평원이라 밭과 집을 지을 만하고, 사방으로 옥을 세운 듯 한데, 산사람이 말하기를 연옹(淵翁)이 일찍이 살았다고 한다.

가리봉

 

  서쪽으로 긴 산등성이를 보면 산등성과 기슭이 모두 석봉으로 매우 기묘하고 이상하며, 비슷하게 겹쳐졌는데 가리봉(稼里峰)이 매우 뛰어나다. 그 서편은 즉 옛 기린현(麒獜縣)이라고 한다. 대(臺)의 서북쪽은 가로막혀 있어 멀리 볼 수 없다. 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깊숙한 곳에 예전에 왕의 성궐(城闕)이 있었고, 석축의 자취가 있다고 하나 사(事)는 있으나, 사(史)가 없으니 어찌 보고 알리요.

 대(臺) 서쪽으로 내려와 길을 되돌아와서 시내 물을 따라 서북쪽으로 갔다. 좌우가 가파른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언뜻언뜻 보일뿐 만경대(萬景臺)는 보이지 않는다. 좁은 골짜기를 단숨에 오르고 나면 숨어 있는 것들이 보이고, 무릇 20여 리의 양쪽이 기이함이 점차 적어진다.

 또 10리 쯤 가서 와천(瓦川)에서 밥을 먹고, 앞에 시내를 건넜는데, 이 시내는 곧 곡백(曲百)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아래로 흐르다 한계(寒溪)물과 합쳐진다. 서남쪽으로 10리를 가서 원통역(圓通驛)에서 잤는데 역은 평평하고 널찍하였다. 집에서 듣기로는 그 아래로 샛길이 있는데 북쪽의 서화(序和). 용산(龍山)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금강산(金剛山)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동틀 무렵에 일어나 서쪽 6. 7리를 옮겨 대천(大川)을 건넜는데, 대천(大川)은 금강(金剛)에서 오는 물로 곡백(曲百)의 물과 합류한다. 또 서쪽 10여 리에서 합강정(合江亭)에 올랐다. 합강정(合江亭) 정자 앞에서 곡백(曲百)의 하류가 기린(麒獜)에서 오는 물을 받아드려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물을 소양강(沼陽江)이라고 하는데 인제(麟蹄)를 감싸 안고 흐른다. 정자는 그윽하며 한가롭고 깨끗하며, 금강산(金剛山)의 먼 지맥에 의거하여, 두 시내가 합쳐지는 곳에 임하고 있다. 두 시내는 대체로 설악을 싸고 흘러오는 것인데 마주하고 있는 산은 설악의 지맥이다. 계속 돌아보며 미련을 두게 한다. 대개 설악(雪岳)의 산은 금강(金剛)의 산을 근본으로 한다. 미수령(彌水嶺)을 지나면서 비로소 우뚝 선다. 남쪽으로 조금 돌아가다가 서쪽으로 가며 일어선 것이 비로소 높아지면서 상설악(上雪岳)이 된다. 조금 앞으로 가다가 낮아지면서 잠깐 남쪽으로 가다 조금 서쪽으로 가며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중설악(中雪岳)이다. 우뚝 선 것이 하늘에 이른다.

 서북쪽으로 빠져나오면서 내려오다가 돌면서 일어선 것이 청봉(靑峰)이다. 이내 내려가면서 봉정(鳳頂)의 산등성이가 된다. 청봉(靑峰)의 큰 형세가 서남쪽으로 가면서 조금 낮아지다가 조금 높아진다. 크게 일어나면서 청봉(靑峰) 및 상설악(上雪岳)과 나란한 것이 하설악(下雪岳)이다. 조금씩 낮아지면서 서북쪽으로 간 것은 빽빽하게 긴 산등성이가 되는데, 미수령(彌水嶺)에서 일어난 것과 서로 마주한다. 매우 낮아지면서 남쪽으로 빠진 것은 다른 산이 된다. 멀리 간 것은 오대산(五臺山)과 대관령(大關嶺)이다. 또 매우 낮아지면서 서남쪽으로 빠진 것은 오색령(五色嶺)이다. 오색령이 서쪽으로 굽어지다가 다시 일어나서 큰 것은 한계(寒溪)의 서쪽 산이다. 꼬불꼬불 높고 길게 굽으며 북쪽으로 간다. 그 길이는 하설악(下雪岳)의 산등성이와 견줄 만하다. 두루 안고 있는 큰 줄기는 모두 흙이 많고 돌은 적으며, 울창하고 두터우며 크다. 우뚝하며 넓고 멀다.

동북으로 빠져나오면서 바깥 산이 된 지맥의 산기슭은 홀로 낙산(洛山)과 천후산(天吼山)으로 가리는 것이 없다. 보문(普門), 식당(食堂), 신흥(新興)의 수없이 기괴한 여러 돌산봉우리는 모두 구불구불한 가운데 감춰져있다.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상설악(上雪岳) 및 청봉(靑峰)의 안쪽과 갈기가 나누어지듯 순서대로 있는 것은 하설악(下雪岳)이다. 왼쪽으로 빠져나오고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서 긴 산등성이에 서까래를 펼쳐놓은 듯 한 것은 한계의 서쪽 산등성이다.

동쪽으로 나란히 빠져나가면서 고슴도치 털과 같이 찢어놓은 것은 짧거나 길며, 크거나 가느다라며, 높거나 낮은데, 모두 돌산봉우리로 환옥(還玉)처럼 뛰어난 것들이 거의 만여 개에 가까운데, 모두 큰 줄기에 포함된다. 서쪽으로 나란히 치우친 것은 큰 줄기가 합쳐지는 곳인데, 모두 흙산이 뒤섞이고 구름 낀 나무숲이 푸르고 무성하여 가로막는다.

 기이하게도 물은 바람에 끼인 듯이 정상에 모였다가 흘러내리는데, 백담사(百潭寺)가 최상이고, 식당(食堂)의 물이 둘째며, 한계(寒溪)의 물이 다음이다. 깨끗하고 빛나는 온갖 골짜기와 봉우리는 깊숙이 가두어두고 아무도 모르게 숨는 것이 똑같아서 밖으로 빼어남을 드러내는 것은 백 중 한 둘에 지나지 않는다.

아! 또한 기이하구나! 이것은 대개 높고 두터우며 빼어나고 넓지만, 신령스런 땅을 덥수룩하게 감추고, 바깥을 흐리고 질박하게 하여 자신을 자랑하여 빛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문장에 비유한다면, 한유(韓愈)가 혼탁하게 돌아가는 온갖 괴이함을 바다 속처럼 감싸고 멀리 했음인가? 전쟁의 책략에 비교한다면, 분양(汾陽)이 높이고 깊숙하게 여러 가지로 변화함을 관대하게 아우름인가? 오직 성대한 덕을 따르고 많은 능력을 갖춘 자만이 이에 짝할 수 있으니 군자(君子)가 즐거이 오르고 보는 바가 마땅하리라.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겨우 7일이고 본 것은 많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만약 자세하게 보려고 한다면 마땅히 30여일을 보내야한다. 미수령(彌水嶺) 남쪽으로 치우친 곳은 동서의 산록을 찾아야만 한다. 토왕성(土王城)의 위아래와 양쪽은 폭포를 온전히 감상할 곳을 찾아야 한다. 권금성(權金城)의 가운데와 식당(食堂)의 서남쪽 깊은 계곡, 보문(普門)과 수렴(水簾)의 계곡, 중설악(中雪岳)의 서남쪽 치우친 곳, 매월(梅月)옹의 검동(黔洞) 황량해진 터, 원효(元曉)의 영혈사(靈穴寺), 영시암(永矢菴)에서 신흥사(新興寺)로 향하면서 고개를 넘을 때의 동서 계곡도 찾아야 한다. 합계(合溪)부터 폐문암(閉門岩)으로 들어가면 가야굴(伽倻窟)을 다 찾을 수 있다. 수렴동(水簾洞)의 서북쪽은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수렴동(水簾洞)의 쌍폭으로부터 서남쪽 계곡의 폭포 근원과 동남쪽 계곡의 폭포 근원을 탐색해야 한다. 백담사(百潭寺)부터 한계(寒溪)의 대승령(大乘嶺)으로 향하면 듣건대, 그 계곡은 매우 길고, 그 물도 또한 기이하며, 고개는 특히 높은데, 자지(紫芝)가 길옆에서 자란다고 한다. 

하설악(下雪岳)은 안에 있는 산의 감상할 곳과, 한계(寒溪) 좌우의 바위산굴, 한계(寒溪)의 진목전(眞木田)을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진목전(眞木田)을 지나 한계(寒溪)를 다 거친 후, 오색령(五色嶺)을 넘으면 무더기로 기이한 것과 빼어난 것들이 반드시 좋아할만 하다. 한계(寒溪)의 서쪽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정상에 올라 한계(寒溪)의 좌우와 기린(麒獜)의 옛 마을을 남김없이 알아야 한다. 모든 것들은 지금 바빠서 다시 돌아보지 못한 곳이다. 그 승경(勝景)을 가려서 기록한다.

때는 숭정(崇禎) 기원후 세 번째 경진(庚辰:1760년), 영조 36년 4월 20일 갑오일(甲午日)이다.

                                                                     출전: 삽교집(필사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