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인사동 이골목 저골목 오후 답사기../22년10월26일
오찬장소인 "수연"으로..
박교수님 단골이라는 예약된 집에 들어가니 우리 일행 13명의 식단이
정갈하게 차려있다. 보기만해도 맛갈있어 보인다.
보리굴비에, 불고기에, 간장게장에, 매일담근다는 김치등등..
서산 어리굴젓도 투어로 힘빠진 입맛을 돋구어 준다.
"취명헌"
오찬을 마친 후 보이차 집으로 갔다.
중국차의 내역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직접 차를 다려 따라주는
주인사장의 자세함에 고마움을 표한다. 세차례에 걸쳐 다려서 따라주는데도
진정한 맛의 진면목은 언제쯤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차에 대한 식견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좋은 기회였다.
갤러리올
김운홍작가의 "수호천사"전시장에 들러..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진 않지만,
당신을 은원하는 불멸의 존재가 있습니다."
"대화가 필요해요"
율곡 고택터
그 곳에 회화 나무가 있다.
이곳에 있는 회화나무는 400년 된것으로 추정하고있다.
예로부터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학자가 나오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양반 집안에만 심어 왔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잡신을 쫓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의 역할을 하도록
회화나무를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이 터는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았던 집터로 "조선왕조실록"은 이 일대를 가리켜
"독녀혈"이라고 묘사 하였으며 이 뜻은 과부가 많이 나온다는데서 유래된 말로
"과부골"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과부가 나는 땅에 율곡같은 대학자가 살았던 것은 풍수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또 율곡 이후에도 여전히 독녀혈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에 대해 영탑산사 학암스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독녀혈"은 3대에 한번씩 요동을 치는 자리로써 보이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이란 다름아닌 여인의 자궁을 상징한다. 3대에 한번씩 요동칠때마다 불운이 있다.
큰 구멍은 하나의 큰 기둥을 벗삼아 살아야 하기에 그 깊은 구멍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
현재 이곳의 회화나무는 바로 그러한 까닭에 세워진 것이고
율곡과 같은 대학자는 요행히 3대에 한번씩 요동치는 그 시기를
비켜섰기 때문에 아무 탈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참고문헌] 내 운을 살려주는 풍수여행/김두규 저,동아일보사, 2008
태화빌딩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태화관 자리다.
태화빌딩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순화궁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조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김재청의 딸) 사당인 순화궁이 있던 자리다.라고 쓰여있다.
경빈 김씨는 1847년(헌종 13년)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후사가 없자 정식으로 간택하여
들인 후궁으로 궁호를 "순화"라 하였다.
헌종은 창덕궁내에 낙선재를 지어 자신과 경빈 김씨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창덕궁내에 석복헌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사용하게 하였다.
묘소는 서삼릉 내 귀인묘역에 있다.
태화빌딩 건너편 마크 호텔, 죽동궁 터(竹洞宮址)에 있다.
죽동궁은 순조의 장녀 명온 공주와 그 남편 김현근이 살던 곳이다.
그 후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이 곳에 살면서 김옥균,홍영식,어윤중 등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국을 주도 하였다.
공평빌딩 지하
공평빌딩 재건축시 발굴된 조선시대 거리와 주택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조계사 건너편, 농협 종로점,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사옥이다.
노란색깔로 변한 가로수 은행잎은 인사동 거리를
바닥까지 노란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답사를 마치고 해산후에 종계사에 들렀다.
국화로 경내는 축제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