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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가지돌아보기..전주객사풍패지관, 전라감영, 풍남문..//22년12월24일

가잔티 2022. 12. 24. 19:08

 

 

 

전주에 내려갔을때는 눈은 그쳤지만 시내 도로는 눈이 치워지지 않아

12월24일 오후 3시부터 운동삼아 걷는 길은 조심하지 않으면 미끌어지기

쉽상이었다.

 

와도와도 이렇게 많은 눈이 올줄은 차마 예상을 못했을테니

이제는 자연적으로 녹아 주기만을 바랄뿐이다.

 

 

 

전주 중앙성당을 지나 젊은이들이 많이 오가는 길로 들어선다.

 

 

 

 

시가지는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거리와

이제는 한적한 골목길로 뒤로 밀려난 구 거리로의 구분이 완연하다.

 

 

 

 

경기가 살아났다기 보다, 주말과 크리스마스 이브가 겹쳐서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온것 같다.

 

 

 

 

전주객사 풍패지관..

객사는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으로서

관아에 관련된 시설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시설에 해당된다.

 

원래는 전주 감영과 한 울타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별도 공간으로 분리 되어있다.

 

 

 

 

 

 

 

 

 

 

 

풍패(豊沛)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유방이 고향인 지금의 강소성 패군 풍현에서 기병(起兵)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오르자 고향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해 준 일이 있다.

그 뒤부터 제왕의 고향은 모두 풍패라고 대칭(代稱)한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라도 전주(全州)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풍패지향이고 조선시대 전라도의 위상을 말해주는

전국 8도중 가장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의 건물중 외국사신등의 귀빈들을 위한 객사에

중국사신이 적어놓은 풍패지관이란 현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전주성은 풍패지향의 성이라 하여 남대문은 풍남문(豊南門), 서대문은 패서문(沛西門),

동대문 완동문(完東門), 북대문 공북문(拱北門)으로 사대문을 명명하였으며

루인 풍패루(豊沛樓)가 있었고 아직도 풍남문이 남아있으며 5월에는 전라북도 풍남제가 열린다.

 

 

 

 

 

 

 

 

풍패지관은 중앙에 정청을 중심으로

동편에 동익현, 서편에 서익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감영으로..

원래는 전라감영 자리인데  전북도청이 자리잡고

있다가 이전해가면서 전라감영을 복원해놓았다.

담장 너머로 선화당이 보인다.

 

 

 

 

"나라의 군수품을 다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가 없는것이다." 먼저 안으로 들어 가기전 내삼문 옆 왼편으로 

소나무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글귀가 삼면으로 새겨진 비석을 만나게 된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이순신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된 문장이다.

 

 

 

 

풍남문과 250m 떨어진곳에 지난 2000년 전북도청이 이전한 자리에 전라감영이 복원됐다.

1884년 전라감영을 방문한 외교관이 남긴 사진과 옛 문헌을 참고하였고,

자재는 100년이 넘은 금강송, 전통 방식으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여 숭례문을 복원한

이근복 번와장이 건립했다.

 

 

 

 

선화당(宣化堂)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건물로

감영 입구인 포정문에서 관찰사가 서무를 집행하는 선화당까지는 

중문 또는 삼문으로 구성되어 권위를 상징하며,

감영 전체 배치 구성의 중심축을 담당한다.

 

 

 

 

 

관풍각이다.

연회 장소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된 곳이다.

 

그 앞에는 전라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집무실이었던

비장청이 있던 자리에 표식만 남아있다.

 

 

 

 

가석과 폐석..

관찰사가 집무하던 선화당 섬돌아래 가석과 폐석이 있는데

가석은 왼쪽에 설치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위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은 오른쪽에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을 하소연 하게 하는

신문고의 표석이라고 한다.

 

 

 

 

 

 

 

 

선화당 안으로 들어서니 디지털 복원을 해 놓았으며

전라감사의 집무실이 장 꾸며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감영의 최고 통치자인 관찰사는 임기 2년으로 정, 사법, 군사상의 최고 책임자였고,

민정, 군정상의 실권자로 전라도 통치행정을 총괄하며 위로는 국왕의 통제를 받고

아래로는 전라도 56개 군,현의 수령들을 지휘 통솔했으며, 이곳을 거쳐간 관찰사

숫자만도 557명에 이르렀다.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로

관찰사 18기, 판관 5기, 주영장,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일부러 찍은 사진이다.

간판이 보이도록..

 

 

 

 

 

 

 

 

영신당 뒷편으로 나가니 수령 150여년된 회화나무가 있다.

오랜 역사를 품고있는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한다.

 

 

 

 

 

 

 

 

 

 

 

 

 

 

 

 

"연신당"이다.

논어 "술이편"에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라는 연유에서 붙인 당호다.

 

전라감사의 처소로 1688년에 전라감사 이유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나오는 길목..

전면에 전주완주경찰서가 있다.

 

 

 

 

큰길가로 나와 감영 담장길을 본다.

 

 

 

 

전라감영에서 길을 건너면..

전주완산 경찰서 외벽에 18세기의 전주지도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18세기에 그려진 예 지도를 보면 전주읍성은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이다.

네 모서리는 각지지않고 부드럽게 휜 모양새다.

전라감영이 중심에 있고, 그 동편에는 경기전이, 한옥마을은 읍성의 변두리였다.

 

 

 

 

이제 역사의 향기가 도도히 흐르는 풍남문으로 가본다.

 

 

 

 

 

 

 

 

 

 

 

 

가까이 와서 보는 풍남문이다.

 

전주성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은 1597년에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절반이 넘게 허물어져 있던 전주성을 1731년에 크게 고쳐 쌓았고,

남문을 명견루라 하였다가 이후 1767년에 소실된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짓고 풍남문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