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앵봉산돌아, 서오릉을 답사하다..//25년2월8일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날씨이다.
앵봉산은 은평구에 있는 높지 않은 동네뒷산 정도의 야산이다.
서오릉고개 녹지연결통로 우측에 설치된 계단으로 오른다.
연결통로는,
봉산과 앵봉산의 도시자영공원 녹지를 친환경적인 기법으로 연결하여
생물이동 통로를 확보하고 은평둘레길 및 서울둘레길을 이용하는 시민에게
편의 제공 및 생물 종 다양성 증진에 기여하고자 조성된 통로이다.
지그재그로 설치되어있는 데크길,
산 중간 지점까지 데크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데크길을 가다보니 이곳에서 벌목해 놓은 폐목을 활용하여
여러종류의 동물상을 설치해 놓았다. 그 중 돼지는 넘어져 있다.
데크길 종점,
앞에 봉산이 보인다.
이제부터 눈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계속 이어진 철책, 안쪽이 서오릉이다.
산이 온통 서오릉을 경계로 한 철책으로 둘려쌓여있다.
앵봉산정상에있는 MBC불광중계소이다.
앵봉산(鶯鳳山, 235m),
꾀꼬리리가 많이 살아서 앵봉산이라 불리며 매봉이라 불리기도 하는
앵봉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몇십미터만 내려오면 전망대 데크가 나온다.
아래로 보이는 숲이 서오릉, 멀리 봉산도 보인다.
멧돼지가 철망을 구부리고 능안으로 들어간 흔적,
사람발자국은 없고 맷돼지발자국만 남아 있다.
쉼터에서 한숨 돌리고,
다시 철책길 따라 우측으로 하산,
어디인지 모르고 내려왔는데 고양시 창릉동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서오릉가는길이 막막하다. 직접가는 버스고 없고, 택시도 가지 않는다.
결국 버스를 타고 가까운 곳에서 내려 또 한참을 걸어야 했다.
가는길에 들른 식당,
규모는 200명이상 입장 가능하다고 선전되어 있는데,
맛별로,
서오릉에 도착,
전에는 이곳이 입구였는데 지금은 우측으로 더가야 한다.
매표소에 도착,
우측 문화관에서 서오릉에 대한 안내를 보는것도 필요할 것같다.
역시 멧세지 출연에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있다.
내려오면서 본 철조망를 뚫고 들어온 멧돼지가 나간 흔적이 없는걸 보면
이 릉안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고양 서오릉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란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릉군이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경릉)가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예종의 창릉,
순회세자의 순창원, 인경왕후의 익룡, 숙종의 명릉, 정성왕후의 홍릉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옮겨져 5기의 능과
2기의 원, 1개의 묘가있는 현재의 서오릉이 되었다.
서오릉 5.14km를 다 돌아보려면 2시간 넘게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은 늦게 도착해서 명릉, 익릉, 수경원 새곳만 돌아보았다.
명릉(明陵), 조선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능이다.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아들로 1667년(현종 8)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동안 붕당간 정치적 대립이 심한 가운데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상평통보를 유통시켜 상업을 장려하였다. 또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고,
왕실의 질서와 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1681년(숙종 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89년(숙종 15) 원자 책봉문제로
환국이 일어나면서 폐비되었다가 5년뒤 복위되었다.
인원왕후 김씨(1687~1757)는,
경은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인현왕후 사후 1702년(숙종 28)왕비로 책정되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경종 연간에 있었던 붕당 간의 갈등 속에서 영조를 보호하여 왕위에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그 옆에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정하여 명릉을 쌍릉 형태로
조성 하였다. 이때 문석인과 무석인, 장명등 등 석물의 크기를 줄여 왕릉공사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후 1757년(영조 33) 인원왈후가 세상을 떠나자 숙종과 인현왕후 능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명릉을 지나 재실쪽으로 가다보면,
참 오래되었구나!를 느낄정도로 키가 큰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재실(齋室),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해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사에 관련된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을 보관하고 축문을 준비하는 안향청과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과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분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 재실 마루에 앉아 있는게 더 온화하다.
둘은 남아있고, 둘은 다시 답사에 나선다.
이곳도 예외없이 지난 눈에 의해 피해를 입은 소나무가 보인다.
그나마 많지 않은게 다행이다.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인경왕후 김씨(1661~1680)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71년(현종 12) 왕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6년 뒤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릉은 명릉과 비교하여 석물의 크기가 크다. 정자각은 정전 양옆으로 한 칸씩을
더 내어 벽 없이 기둥을 세운 익랑(翼廊)을 갖추었다.
수경원(綏慶園),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사도세자, 莊祖로 추존)의 모친의 묘소이다.
영빈 이씨(1696~1764)는,
이유번의 딸로 1701년(숙종 27) 궁녀가 되었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에 책봉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와 6명의 옹주를 낳았다.
수경원은 처음 의열묘라는 이름으로 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경내에 조성되었고,
1788년(정조 12) 선희묘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생모 지위에 맞게 묘를 원으로 높여 수경원이라 하였다.
1970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나머지 창릉, 홍릉, 경릉, 순창원, 대빈묘는 다음에 돌아보기로 하고
경내를 나왔다. 밖에서 보는 서오릉 이정표가 눈이 쌓여있는 주변의
풍경과 함께 새롭게 보인다. 산길, 도로길 13km에 2만보 넘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