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저산산이좋아/한양도성길을

병자호란의 애환이 서려있는 남한산성의 성곽로를 따라서..//25년3월1일

가잔티 2025. 3. 1. 19:52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에서 ,

산성 오르는 곳까지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이 볼만하다.

지하철역에서 산성진입로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주변에 암석이 많아서인지 큰돌에 작명을 해서 세운 돌들이

많다보니 요즘같이 앙상한 나무들만 있는 계절에는

돌들을 이용한 석상들이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 들게한다.

 

 

 

 

약수터도 여러곳 보인다.

어떤곳은 약수터위에 있는 나무가 뿌리째 뽑혀 위험하게 보인다.

 

 

 

 약간은 오르막길을 쉬엄쉬엄 올라도 땀이 난다.

영상의 날씨이나 미세먼지인지 시야가 좋지 않다. 

 

 

 

수령 450년 된 느티나무,

수고는  17m. 가슴높이 지름 1.45m이다.

 

 

 

남문(南門·至和門)에 도착,

남한산성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다.

남문은 지화문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인조반정 다음해인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조선역사에 유일하게 내부 반정군에게 도성이 점령당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인조가 왕에 오른지 10개월, 창덕궁은 또 다른 반란군에게 점령 당한다.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만에 끝났지만,..

반정공신 주모자인 이괄이 2등공신에 책봉된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괄은 거침없이 도성으로 진격했고 인조는 황급히 창덕궁을 빠져나가 공주로 피신했다.

창덕궁을 점령한 이괄은 선조의 또 다른 손자를 왕으로 옹립했다.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이괄의 반란군은 각각 인왕산과 안산에 진을 치고 전면전에 들어갔다.

 

전투에 앞서 이괄은 승리를 장담하며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것이라고

도성 백성들에게 호언 장담했던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의 곡성부분부터 남대문까지 하얀 의복을 입고 온 도성민들을

구경하게 하여 성곽 일대가 하얀 빨래줄을 이룬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투결과는 이괄의 패배였다.

전투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이괄의 반란군이 패배하자 도성문을 걸어 잠궜다. 

결국, 경기도 이천까지 피신했던 이괄은 자신의 부하에게 배신 당해 처형당한다.

이렇게 해서 이괄의 난은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인조 반정의 후유증은 크고 깊었다.

 

인조반정의 가장 중요한점은 당파들이 당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더이상 국왕은 왕조국가이지만 국왕이라고 무조건 충성의 대상이 아니고 

당파의 시각에서 바라볼때 우리당과 당론이 같으면 충성을 하는것이고

당론이 틀리면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627년, 인조반정의 후유증으로

 정국을 불안하게 하는 역모사건이 뿌리를 물고 일어났다.

인조를 몰아내고 광해군을 복위 시키겠다고 공공연히 표방한 반란세력도 있었다.

역모사건을 진압한 인조정권은 정치사찰을 강화했다.

감시가 강화되자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군사들도 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조정권의 정치 사찰에 걸려 역모로 의심받을것을 우려한 무관들이

군사훈련을 꺼려했던것이었다.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남이홍은 정치 사찰의 폐해를 이렇게 토로했다.

'조정에서는 내가 마음대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거나 기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것은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한으로 남는다.'

 

대륙의 정세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 갔다. 

명나라는 점점 기울어갔고 후금은 심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더욱 강성한 기세로 뻗어 나갔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태종은 숙명반청기치를 내건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린 인조정권은 서둘러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그러나 총동원령을 내리고 4,000명의 군사를 징발했지만 모여든 군사는 수백명에 불과했다. 

 

후금의 태종이 35,000명의 팔기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것은 

1627년 인조반정 5년만에 맞게된 정묘호란이었다.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후금과의 충돌은 예견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국제질서가 그 당시에는 명나라가 힘의 우위에 있었으면

전쟁을 맞지 않았을 수 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던 국제질서는 후금이었고,

후금을 계승한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었던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후금과의 전면전,  명나라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서인들의 사고, 

이런것은 청나라의 침략을 피할 수없는 그런 상황을 초래했다.

 

그로부터  9년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은 거부했고, 

 

1636년 그해 12월,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처음 압록강을 건넌 팔기군 선봉대가 한성에 도착한것은 단 6일만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향하던 가마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가파른 산세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에서 1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에 맞섰다.

하지만 한겨울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남한산성은 참담했다.

성안의 군량은 바닥났고,

산성지원에 나섰던 각도의 군사들도 차례대로 패배했다.

국제적 역학관계를 무시한채 명분론으로 국제질서에 맞섰던 인조의 정권은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성문위로 올라가 보면,

성곽으로 왕래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가파르고 눈길이어서 

힘들고 질퍽 거리니 아래로 내려가서 오르도록 한다.

 

 

 

 

 

남문으로 들어와 둘레길따라, 

수어장대로 오른다.

 

 

지난 폭설에 이곳도 피해가 크게 남아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넘어지고, 가지가 부러지고,

 

 

 

길옆에 힘겹게 버티고 있는 앙상한 몇그루의 나무,

한달 지나면 많은 시선을 받을 산수유 나무이다.

 

 

 

 

 

 

 

 

 

제 6암문(서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산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 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수어장대로 오르는 곳에도 소나무 피해는 이어진다.

 

 

 

 

청량당(淸凉堂)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장군과 부인,

그리고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회장군은 공사비 횡령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부인 송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장군은 인조 2-4년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였는데, 이는 장군이 주색잡기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하였다고 모함당하였다.

장군은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마리가 날아 오리라고 했다.

그런데,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마리가 날아와, 서장대(수어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매바위 상부에 매 형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우측에 있는 수령 360년, 수고 2.5m의 향나무,

지난 폭설에 윗부분 가지가 부러진채로 매달려 있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로 불리는 수어장대는 총지휘소인 장대로, 

장수의 지휘와 관측 목적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지었다.

 

 

 

탁지부측량 소삼각점

대한제국 말기(1908-1910년초) 탁지부(度支部)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전국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地籍細部測量)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하였다.

이곳 수어장대에 설치되어있는 구소삼각점은 장대(將坮)라고 불리며,

머리 부분에 "†"자가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度支部"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소재:경기도 광주시 남한성면 산성리 815-1(지목:사적지)

 

 

 

 

무망루(無忘樓)

영조가 삼전도 굴욕을 잊지 말자는 각오를 다질 목적으로 지었다.

 

 

 

 

 

서문(右翼門)에 도착,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으며,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산성을 나간 바로 그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 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에서 보이는 국청사,

인조로부터 팔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으로 임명받은 각성대사는 전국에서 승군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고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서기1625).

병자호란으로 인한 수모를 또 다시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 하나가 국청사이다.

 

 

 

 

지나온 서문을 보면,

 

 

 

 

이 지점이 서울 경관 촬영 추천 명소이다.

 

 

 

흐린 날씨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장소에서 담은 서울시가지 야경,

 

 

 

 

외곽길로 내려가는이들은 이곳을 자주 찾는이들 같다.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옹성으로, 둘레는 315m이다.

제 5암문으로 통하며,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 한강이,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잘 보인다.

 

 

 

 

 

이제 북문으로 하산길은 성곽 외곽길로 잡았는데,

눈이 남아있어 미끄러질까 우려도 되는 길이었다.

 

 

 

 

 

 

 

북문(北門, 全勝門)

병자호란 당시 북문은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 공격을 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락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북문을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하남시 고골(먹거리촌), 법화골이 나온다.

 

 

 

 

산성마을 종로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기위해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아도 마땅치 않아,

 

 

 

식당명도 모르는 이집에서,

감자전, 곤드레정식으로 한끼니를 하고 나니, 오후 3시 지나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산성까지 다니는 버스에 70여명이 타고 하산했다.

 

 

 

 

 

 

행궁, 임금의 임시 거처

 

 

 

산성 로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