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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도심속의 봉은사를 찾다../16년6월16일(토)

  

 

 

 

 

 

 

노블발렌티 채플홀에서..

 

 

  

 

 

 

 

원탁테이블에

곡물빵과 먹물빵이 놓여져 있고 

   첫번째로 연어샐러드가 나온다.   

 

 

 

 

두번째는 양송이크림스프 

                                            메인 스테이크                                       

 

 

 

 

 

                                트 망고 케이크, 커피                              

 

 

 

 

예식장을 나와 인근에 있는 봉은사로 향한다.

날씨는 29도라고는 하나 바람이 없어 무척이나 따가웁게 느껴진다.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 1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입구가 보인다.

부처님 오신날이 한참 지났는데도..

 봉은사로 들어가니 소원을 담은 글과 가족 이름이 적혀있는

공양등이 형형색색으로 이곳을 방문하는이들을 반긴다.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 밑(경기고등학교 바로 아래)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봉은사는 1,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봉은사(奉恩寺)는..

 신라 원성왕 때인 794년 창건당시는"견성사"라고 불리었다.

  1498(연산군 4)에 제9대 성종의 무덤인 선릉을 위한

사찰(능사 陵寺)이 되면서 크게 중창되었고  "봉은사"로 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에는 공식적으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승과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바로 그 승과 시험이 봉은사에서 치러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을 이끌고 싸웠던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이곳을 통해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도로에서 보아도 이곳이 사찰임을 알수 있다. 

마야부인이 륨비니 동산의 무우수 그늘 아래서

아기 부처님을 낳으신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입구 초입 좌츤에 보우대사 상이 있다.

스님은 명종 때인 1551년에는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문정왕후가

보우 스님(1510~1565)을 봉은사의 주지로 삼아 지원하였다.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으며 교단을 정비하고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주도로 왼쪽은 물이 흐르고 작은 웅덩이들이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우측은 부도탑들이다.

 

 

 

 

 

 

 

 

 빨강, 분홍, 파랑, 노랑, 초록의 오색 연등의 향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흰등도 이어져 있었다.

 

 

 

  

 

 

 

 

 

 

 

 

 

 

 

   

 

 

 

 

 

 

  

 

 

 

 

  

 

 

 

 

 

 

 

 

 

  

 

 

 고층건물과 사찰의 기와지붕이 절묘히 어울린다는 느낌..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서울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대불

 

 

 

 

 

 

  

 

 

 

 

 

 

 

 

 

 

 

 

 

 

 

 

 

 

 

 

 

 

 

 

판전은 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건물로,

 이 안에는 대방광불화엄경() 수소연의() 초판 3,175점이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 철종 7년(1856)에 율사로 이름을 떨친 남호() 영기()스님이 조성하였다 하며

지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목판을 봉안하기 위하여 신축한 건물이 판전이고,

여기에 현판으로 걸린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곧 김정희서판전현판이다.

 

이 판전 글씨는 낙관부의 "(칠십일과병중작)"이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추사의 말년작으로 유명하며,

이 글씨를 쓴 3일 후에 추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더욱 영험하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