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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산이좋아/한강변돌아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수양벚꽃은 봉우리만, 그래서 원내에 호국 지장사와 창빈 안씨묘역을 가다..//25년3월30일


 

 

아침에는 1도, 한낮이라고 해도 6도, 가끔 눈발까지 날리는,

어제에 이어 이틀째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되니 두꺼운 의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주일 11시 예배를 마치고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다.

 

 

 

 

그런데 수양벚꽃은 몇가지에서 몇개의 꽃만 피어났을 뿐이다.

 

 

 

23년 3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때는 상당화도, 수양버들도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있어야 할것 같아 아쉬움을 남기고,

현충문을 배경으로 한장을 담고, 뒷길로 올라간다.

 

 

 

 

 

눈이 오다 그치다를 반복하는 날씨,

목련은 벌써 시들어가는 분위기이다.

 

 

 

 

노랗게 피어있는 개나리꽃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아이러니하다.

 

 

 


 

 

현충원내 정문에서 우측 도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중간 지점에, 

호국 지장사로  오르는 표식과, 붉은 색의 도로가 보인다.

그곳에는 350년 수령을 견뎌내는 느티나무가 잎새 하나 없이 홀로 서 있다.

 

 

 

 

나무가 쪼개질까봐 쇠로 고정해 놓았다.

 

 

 

 

 


호국지장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즉, 도선스님이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서기가 퍼져 나와 그곳에 가보니

칡덩쿨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印)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개명하여 화장암(華藏庵)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일주문이 없고, 바로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지켜주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앙 계단위로 지장단이 보인다.

 

 

 

우측으로 대웅전과 종무소, 심우당이 있고 대웅전 위로

삼성각이 있다. 좌측으로는 능인보전과 범종각, 극락전이 있다.

 

 

 

 

 

석판에 사적을 남겼다,

1577년 조선 선조대왕 강희 2년에 창빈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이곳을 창빈 안씨의 제사에 필요한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찰(造泡寺刹)로

지정해 해마다 포백(布帛)을 내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사찰 부지 약 36만평을 현충원 부지로 내놓아 약 43만평 규모의

국립묘지가 조성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삼성각,

북두의 일곱성군을 불화로 그린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가 있다.

 

 

 

1906년에는 화주 풍곡(豊谷)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 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고,

1920년에는 주지 원옹(圓翁) 스님과 명진(明眞) 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 스님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뒤 1983년에는 혜성(慧惺)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안치된 호곡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 지장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국지장사라는 절 이름에 어울리게 지장보살 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座)의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범종각,

 

 

석탑 중간에 놓여있는 작은 불상,

자세히 보아야 불상이 놓여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능인보전에는 옛날 한 어부가 꿈에 나타난 불상을 한강에서 건져와

집에 모셔두었다가 그 뒤로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되자 

불상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은 왼손이 약그릇을 잡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추정하고 있으며, 신라 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것으로 본다.

 

 

 

소대(燒臺)제를 지낸후 위패와 천혼문을 소각하는곳이다.

 

 

 

뒷산으로 오르는 길,

둘레길 따라 걷는 분들이 이 길을 따라 오르내린다.

 

 

 

호국 지장사를 내려가는 길,

 

 

 

고 박정희 대통령 묘소앞에 진달래 한그루기 만개했다.

 

 

 

현충원내에서 제일 높은곳에 위치해있는 쉼터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호국 지장사,

 

 

 

 

 

 

 

 

 

호국 지장사와 연관된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묘역에 가보다,

위에서 본 묘역 뒷자리전경, 초입으로 내려가 본다.

 

 

 

원내를 걷다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주차장에 있는 표지판,

잘 알려지지 않아서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된다.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묘지, "창빈 안씨 묘역"이란 표지판이다.

 

 

 

1550년경에 이 묘가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니,

현충원보다 475년이 더 되었다는 얘기다.

 

 

 

표지판에서 몇m 위에  신도비가 있는데, 비석은 금이 가있고 글씨는 흐릿하다.

창빈 안씨 일생을 적은 신도비이다.

 

 

 

 

 

 

 

저 계단을 올라야 묘역을 볼 수 있다.

 

 

 

곡장이 둘려져있고 앞에는 묘갈·석등·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

 

 

 

창빈은 조선 선조 임금의 할머니다. 연산군 5년(1499)에 태어나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 궁녀로 뽑혀 궁에 들어갔다. 스무 살때 중종의 총애를 입어 영양군, 

덕흥군, 정신 옹주 등 2남 1녀를 낳았고, 50세(1549)에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하던 시기에, 중종이 승하(1544)하고 다음 임금인 인종이 

즉위 1년도 안된 31세의 나이에 승하(1545)하자, 인종의 이복 동생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도 34세에 대를 이을 자식없이 승하(1567)한다.

 

누가 왕이 될지 모르는 가운데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선조)이 바로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다.

창빈 안씨의 입장에서는 손자가 후궁이 된 것이다. 후궁의 손자가 임금이 되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하성군이 임금이 되자 창빈 묘역은 "임금이 난 명당 터"가 되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조선의 선비들이 낮에는 유교, 밤에는 풍수를

공부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8세기 중엽에 그린 "동작진(銅雀津)"은

바로 지금의 현충원 일대가 배경이다. 좌우의 산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그 앞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든든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 동작대교 북쪽에서 지금의 현충원을 보고 그렸다.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의 장흥리에 장례를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과천(果川) 북면 동작리 언덕으로 이장했으니

지금의 자리이다. 그때부터 "동작릉"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 후에 아들 영야군 이거가 죽자 그의 오른쪽 언덕에 안장하였으나 1581년 2월 26일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마을 후록 인좌원(後麓寅坐原)으로 이장하였다. 

 

 

 

좌우에 있는 석인상,

 

 

지나다보면 담장 일부분이 보인다.

 

 

 

 

 

목련과, 개나리와, 벚꽂이 함께 피어있는 아름다운 장소이었을 

이곳에 개나리만 홀로 피어있다.

벚꽂이 필때 개나리가 지는 일이 혹여,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