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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대전교구

 

 

                   [대전교구]                                         해미순교지

<충난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초딩모임 마지막 코스인 해미읍성을 들렀을때

이곳 주민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어 그 분위기에 휩쓸렸을뿐

성지에 대한 경애심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어진 자료를 토대로 그 당시에 있었던 사연과 현재의 현장을 구성해 본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兵營)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군사적 요충지 진영(鎭營)에는 중앙에서 3품의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해미의 영장은 조선 중기 이후,

3품 벼슬의 무관(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어 담당한 것이 아니라,

종6품의 해미 현감이 겸임을 한 것으로,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자들 중에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터인데 여기에서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이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가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1839)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만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67명 중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33명의 경우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해미 읍성의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감옥 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 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 죽여 버렸다.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죽고 자손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관아 터와 장터 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과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터로 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해미 성지 조성 과정
해미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1935년 당시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바로(P. Barraux, 范)신부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해미의 이주필(李周弼)과 이병준(李秉俊), 도장리의 박승익(朴承益),

조산리의 임인필(任仁弼) 등의 증언에 따라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와 묵주,

십자가 등을 수습하고 서산군 음양면 상홍리 공소<(현 서산 동문동 본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조산리 유해 발굴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국판 40면의 소책자인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敎者略史>를 간행하였다.

 그 후 1955년 4월에 서산 본당의 신자들이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56년 3월에는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와 서산 본당의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가

옛 해미 감옥터와 형구로 사용되었던 돌다리를 찾았다.

돌다리는 6월에 서산 본당으로 옮겨 보관되었다.  


읍성 내 공소 신축과 순교 기념탑 제막식
이어 1957년에는 해미읍성 안에 공소 건물을 마련하였고,

 1962년에는 해미읍성 안 옛 감옥이었던 호야나무 옆의 순교 성지를 매입한 뒤

1966년에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0월 대전교구에서는 ‘순교복자 79위 시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해미면 조산리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념탑 앞에 세운 화강석 제대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의 상석(床石)을 기증받아 다듬어 만든 것이다.


상홍리 유해를 해미로 이장
한편 정부에서는 사적지 보존을 위해 1973년 해미읍성을 사적 116호로 지정하고

 읍성 일대의 복원 작업을 추진하여, 1981년 해미 공소 강당이 철거되었다.

교회측에서도 읍성 안팎의 순교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1982년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1984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하였으며

1985년 4월에는 성지 관리를 위해 해미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에서는 6월부터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를 설치하고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86년 9월에는 서산 본당에 보관 중이던 돌다리를 원 위치인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옮기고

 1989년에는 돌다리 옆에 순교 현양비를 건립하였으며, 1995년 9월에는

옛 상홍리 공소에 안장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 성지로 이장하였다.


현양 협의회의 성역화 사업
이와 함께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에서는

순교 성지 매입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1998년에는

해미읍성 주위의 부지 약 7천 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 본당은 성지에서 떨어져 있어

 순례객들의 미사 봉헌과 성지 관리가 어려웠기에,

해미 본당의 안상길(安相吉, 사도 요한) 신부는 성지 안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2000년 8월에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 1월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하였다.


2003년 6월에 완공된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은 200평 규모의

대성당과 50평 규모의 소성당을 갖추고 있으며,

 성당 뒤쪽에 지름 15m의 대형 묘지 모양의 유해 참배실을

마련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해미성지의 천주교성당

 

 

 

 

 

 

 

 

 

 

 

 

 

성당 뒤뜰의 진둠벙 -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의 상징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유적지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과 신앙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음으로 내몰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산 해미성지(여숫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