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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왜고개 암장과 박순집 (베드로)의 일곱 도적/서울교구

    

 

 

 

  

                      [서울교구]              왜 고개 암장과 박순집 (베드로)의 일곱 도적 

 

-암호명 "예" 와 "수" 로 순교자 시신 절도-

 

박순집의 왜고개 암장 사실을 오기선 신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1866년 3월 7일 병인박해로 장 시메온 주교, 유스토 마리아 백 신부

그리고 루도비코 서 신부가 순교한 후 군문효시하여 시체를 물샐틈없이 수직하는 통에

모래톱에 방치한 지 40일 후인 1866년 5월 28일에야 무인 박순집 베드로가

다른 교우 여섯 명을 데리고 암암 칠야 지척을 분간할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새남터 모래사장을 두패로 나누어 암호를 정해

두더쥐처럼 조금씩 조금씩 기어들어 가면서 한편에서 "예" 하면 얼마

 간격을 두고 어느 어두운 구석에서 "수"한다. 합치면 "예수" 란 낱말이 된다.

  

       강화 갑곶성지 내 박순집 베드로의 묘

 

 

 

 

그래서 자기 동지인 줄 알고 마음 놓아가며 세 순교자 시체 절도사건을 벌인 것이다.

장사요 억척이던 박 베드로가 세 시체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예" 와 "수" 가 일초 간에 마주쳤으니 일행 거룩한 일곱 도적이

이 세 시체 앞에 모였다는 증거다.

 

   서 루드비코 신부가 숨어있던 동굴<하우현성당성지순례중>

 

 

 

          

-시신 입에 물고 왜 고개 암장- 

박 베드로가 장 주교, 백 신부, 서 신부의 수염을 함께 합쳐 입에 물고

(그러니 세 목이 박 베드로 턱 아래서 흔들거렸다)

두 시체는 양쪽 옆구리에 끼고 시체 하나는 업고 암암 칠야 극비밀리에

어둠을 갈라가며 탈출했다.

그리고 이 왜고개라고 불리는 자리에 고이고이 암매장을 하고

동서남북으로 발로 걸음을 재고 사면에 암호 표식을 하고 구름처럼사라졌다.

그 일곱명중의 한 명이 김흥민 요한의 계씨를

오기선 신부가 중림동(약현) 교회 보좌 신부로 1933년 1월 10일

부임 당시 면담한 일이 있고 이 역사 담을 들어 두었던 것이다.

 

 새남터 순교성지 지하 기념관 에서... 

 

 

 

 

-시신 발굴때 청천백일에 소나기- 

그 후 20여년이 흘러 민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병인 박해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시체 찾기 운동을 벌이고 계셨기때문에

1890년 인천으로 내려간 지 4년이 되던 해에

박 베드로를 유일한 고증인으로 불러올렸다.

 

1894년 5월 22일에 박 베드로는 민 주교님을 위시하여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과 이 왜고개로 갔다.

 

 어느새 이 왜고개는 북망산처럼 많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다.

동리 사람들이 몰려나와 남의 묘소를 마구 도굴하니

관가에 고소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청천백일에 느닷없이 먹장 같은 구름이 꽉 끼고

뇌성벼력으로 소나기가

빗말치듯하니 동리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다.

  

서소문 순교성지 중림동 (약현) 성당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

왜고개는 현재 군종교구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일곱 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두 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다.

 또한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정성과 맛이 어울러진 점심도시락..

 

 

 

 

-순교자 유해 안치- 

그 틈에 박 베드로가 28년 전 암호 표시했던 무덤을 파헤쳐

그전에 자기가 순교자 성명, 연월일을 먹으로 쓴 사기 대접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됨과 동시에

다시 일기는 구름 한 점 없는 청천백일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듯하다고 직접 그일을 같이 한 김 요한 흥민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오기선 신부에게 일러주고 또 일러주었다.

 

박 베드로의 딸 박 하비에르 수녀도 이 왜고개에 대한 똑같은 회고담을 들려 주었다.

민 주교님은 이 세 명의 순교자 유해를 용산 성직자 묘소에

 임시로 모셨다가 1898년 5월 29일 명동 성당이 낙성된

       그 지하실 순교자 유해 안치소로 옮겼다.  

              

   - 오영환 저 , 순교의 맥을 찾아서 중 -

 

 새남터 순교성지 성모님 상

 

 

 

 

새남터는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그중 8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자 3명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 순교성지다, 또한 이곳 성지에는 

9명의 성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 성당..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신부,

 베르뇌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지하 새남터 기념관에 모신 9명의 성인 유해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찍은 사진

(새남터 순교성지 지하 기념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