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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강화 그리고 교동도 투어..//14년8월23일


 

 

2014년 8월 23일 토요일..!

아침 9시에 강화를 향해 서울을 빠져나가는데 안개가 많을뿐 아니라

주말이어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차량행렬이 길어진다.

 

강화투어를 애기봉부터..

 

 

 

 

 

 

 

 

x-mas가 되어도 점등을 하지 못하는

철탑 앞에서..!

 

 

 

연미정..

연미정 오르는 길에 있는 민가를 보면

그때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의 한 페이지

앞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2000년 11월 23일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로,

수고는 22m, 나무둘레는 4.2m이다.

 

 

 

 

 

 

평화의 전망대

강건너 북한땅이 지척인데 안개가 가로막아 볼수 없으니..?

 

 

 

 

 

 

 

제적봉의 유래 및 의미

공정식 제 6대 해병대사령관은 최초 김포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하였으나,

1966년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현 애기봉 방문시 애기의 전설을 듣고 제적봉 명칭 대신

애기봉으로 명함에 따라 강화도의 현 고지를 새로이 제적봉으로 정하고, 

1966년 당시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 참석하에 그가 친필로 쓴 제적봉 비 건립과 함께

명명식을 거행했다. 제적봉은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공산 침략자를 무찔러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현재까지도 해병대는 이 봉우리에서 불굴의 투지와 매서운 눈초리로 적을 제압하고 있다.

 

 

 

 

 

교동도를 향하여..

   교동도는 북한쪽 황해남도 연안군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강화도 북단 최전선의 섬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교동은 충청도, 황해도,

경기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 통어영이 설치된 곳이었다.

 당시 교동의 원님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 받았던 곳..

 무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적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방어선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개교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초등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다.

 

 

 

들어가는 우측 늪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평화,

 

 

 

교동 면사무소 경내에 있는 정자는 우리 일행이

둥지를 틀고 하루를 즐기기에 안성맞춤..?

이곳에서 오찬을 즐기고..

 

 

 

 

 

 

화개산을 오르다,

 

 

 

 

이곳 교동도에는 밤나무가 많고, 제법 여물었다.

 

 

 

 

 

 

 등산로 초입에는 주차장이 잘 만들어져 있고

그 틈새 공간을 이용해 이곳 주민들이 가꾼 농산물을 판매하는 난장이 서있다.

 

 

 

연산군 유배지 둘러보기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인해 내쫓겨진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되어 2달만에 사망한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하지만..

 

 

 

  대룡시장쪽에서 오르는 화개산 들머리는 교동면사무소 뒤 대촌마을이다.

 마을 안 수령 500여 년이 되는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대촌마을 마지막 집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정상까지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초입에는 삼림욕하기에 좋은 숲이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한다.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오를 수 있고,

정상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봉우리는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있다. 

 

 

 

 

 

화개약수

 

 

 

 

 

 

 

정상 아래쪽으로는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개산에는 내,외성이 있었으나 내성만 터가 남아있고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면사무소에서 한시간도 안 되어 정상도착..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7년(1629)에 세웠으며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며

동, 남, 북 세곳에 성문을 설치하였다.

각 문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그리고 북문은 공북루하 하였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에 무너져 현재는 홍예만 남아있다.

 

  1753년(영조 29)에 통어사 백동원(白東?)이 치첩(雉堞)을 수축하였고,

 1764년에 방어사 백낙윤(白樂倫)이 남문(庾亮樓)을 중건하였으나 동문(統三樓)과

 북문(拱北樓)은 수축하지 못하였으며, 남문 앞의 해자도 역시 메워 버렸다.32)

규모는 둘레가 4정 26칸 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33) 동, 서, 북문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남문만이 현존하고 있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수영터를 확인할 수 있다. 

 

 

 

 

 

좌측 측벽에 "南樓(남루)"와 "三道統門 (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즉 이곳이 남문이며  삼도통문이라 교동에는 3도 즉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 통어영이 있었다는 뜻을 추측케해준다.

 

 

 

 

 

 

화개사 가는길에 있는  비석군,

 

 

화개사,

 

 

 

 

 

화개사 바로옆에 있는 교동향교로,

 

 

 

 

 

 

 

 

향교에서본 화개산 정상,

 

 

 

 교동도의 관문 역할을 했었던 월선포 선착장에서,

창후리와 교동도의 월선포를 연결해주던 페리호는 보이지 않고

페리의 매표소와 대합실 겸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굳게 닫혀있다.

 선착장 주차장에는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온 여행자들의 주차장이 되고 있었다. 

 

 

 

 

월선포에서 바라 본 교동대교,

 

 

 

 

 

교동대교를 나오면서,

 

 

 

강화로 나와서 고인돌을 보다.

 

 

 

 

 

 

외포리에서 동막 해수욕장에서 낙조를 담다.

 

 

 

교동도에 연육교가 놓여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였다.

 민통선이라는 제약은 있지만..

 

 한때 중국과 고려를 이어주던 교두보였고,

 또 한때는 조선 삼도수군의 심장부였던 교동은

 이제 교동대교의 개통으로 인하여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호랑이친구네한테 메밀칼국수로 저녁을 대접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