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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이런저런모임

11월 끝에 있는 덕수궁은../16년11월25일(금)

   

 

 

 

 

 

 

서울시청지하에..

건립공사중 출토된 유적 전시실이 있다.

 

군기시:고려,조선시대 병기제조등 관장한 관청

 

 

 

 

 

 

 

 

 

 

 

 

 

 

 

  

 

 

 

 

  

 

 

 

 

  

 

 

 

 

 

 

 

 

 

 

   

서울시청 광장에는 X-mas츄리 등장..

 

 

 

 

 

 

 

 

 

마지막 낙엽이 뒹구는 덕수궁(德壽宮)으로..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이였는데

 동문인 대안문을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덕수궁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으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으며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고 한다.

 

 

 

 

 

중화전(中和殿)

 

2중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였다.

 

기단의 둘레는 난간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남향을 하였다.

 

하월대는 지대석 위에 장대석 두 벌대를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으며,

 상월대는 장대석 두 벌대로 설치되었다.

 

 상·하월대 상면에는 잘 다듬은 방형 화강석 박석을 깔았으며,

하월대 전면 좌우와 후면에는 각기 계단이 한 벌씩 놓였다.

 기단 상부는 전을 깔았고 좌우에는 향로를 놓았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때부터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였고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의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였으며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고 한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화전 오르기전 답도에 있는 용조각이다.

다섯개의 발가락으로 황제를 상징하고 있다.

 

 

 

 

 

 

 

 

 

 

 

 

 

 

 

 

 

 

 

 

 

 

 

 

 

 

 

 

 

 

 

내부 중앙 후측 고주 사이에는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그린 병풍있으며,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 천장이 마련되었다.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인데, 내진(內陣) 천장의 중심부에는

위로 쑥 들어간 감입형 천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조각하여 왕을 상징하였다.

 전·후면 어칸에는 사분합 꽃살문, 어칸 좌우 한 칸과 양측면

남쪽 두 번째 칸에는 삼분합 꽃살문,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삼분합 꽃살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 전체에는 빛살 광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기둥머리에는 안초공을 설치하고 내4출목, 외3출목의 포작을 짜 올렸고,

그리고 주심포 사이 어칸에 3개, 나머지 칸에 2개씩 공포를 배열하였다.

 

 

 

 

 

 

 

 

이 기둥에 있는 고리는 잎마다에있는 정3픔석에 있는

고리와 연결하여 천막을 치는데 사용하는 용도 

 

 

 

 

 

 

 

 

 

 

 

 

 

 

 

 

 

 

 

 

 

 

 

 

 

 

 

 

 

 

 

 

 

 

 

석어당(昔御堂)

 1904년 화재로 손실된 후 새로 지은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건물.

선조가 임진왜란중 의주로 가셨다가 환도후에 거처 했던 곳.

  

 

 

   

 

 

 

 

 

 

 

 

 

 

 

 

이곳뿐 아니라 어느 궁에 가도 처마 밑에는 어김없이

그물이 쳐져있다. 일명 "부시"라한다.

 

새들이 둥지를 트는것을 막아 배설물에 의한 건물부식을 막을뿐 아니라

알이나 아기새를 잡아먹기 위해 접근하는 뱀을 막기위한것도 있었다고..

 

 

 

 

 

 

 

 

함녕전(보물제820호)

1897년 건립.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

 

 

 

 

 

 

 

 

 

  

 

 

 

 

 

 

 

 

 

 

 

 

 

 

정관헌(靜觀軒)

함령전 북쪽에 있으며 190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종의 연유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양옥이라고는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목조건축의 요소가 많이 있다

 

 

 

 

 

 

 

 

 

 

 

 

 

 

 

 

 

 

 

 

 

 

 

 

 

 

 

구조물안에 사슴이 영지버섯을 물고 있는 모습,

 박쥐등 부귀를 상징하는 작품들로 만들어져 있다.

 

 

 

 

 

 

 

 

 

 

 

 

 

 

 

 

 

 

 

 

 

 

 

 

 

 

 

 

 

 

 

 

 

 

 

 

 

 

 

 

 

 

 

 

 

 

즉조당(卽阼堂)

석어당과 함께 임진왜란 후 선조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이 곳에서 즉위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역시 이 곳에서 즉위했는데, 그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정전(正殿)으로 사용했으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태극전(太極殿)·중화전(中和殿)으로 불렀고,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렀다.

 

 

 

 

 

 

 

 

 

 

준명당(浚明堂)

석조전의 오른쪽에 있으며 즉조당과 이어져 있는 건물이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1914년에는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 옹주를 위해 잠시 유치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당시 건물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 건물은 그 후 즉조당과 함께 새로 지은 것이다.

 

 

 

 

 

 

 

 

 

석조전(石造殿)

조선시대 궁중건물중 유럽풍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영국인 "하당"이 설계하여 1910년 기공후 1910년 준공되었으며

고종이 고관대작과 외국사절을 만나는 장소로 주로 사용했다.

 

 

 

 

 

 

 

 

 

 

 

 

 

 

 

하루에 세번씩 열리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교대식은 매일 오전11시 오후2시와 3시30분.

 

 

 

 

 

 

 

 

 

 

 

 

 

 

 


  

 

 오후 1시 숭례문에서는..

 

 

 

 

 

 

 

 

 

 

 

남대문이냐..숭례문이냐를 놓고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되곤 했던 국보 1호

 

 2008년 2월 10일에는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온 국민이 충격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사회불만을 품은 70세 노인이 밤 11시쯤 숭례문 2층 누각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한 시너를 뿌린 후 불을 붙이고 도주했다.

범인은 나중에 잡혔으나 소방차 32대·소방관 128명이 출동한 화재진압은 실패했다.

 결국 다음날 오전 1시54분쯤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 남긴 채 국보 1호가 전소됐다.

 

 

 

 

 

 

 

 

 

 

 

 

 

 

 

숭례문에는 130여 곳의 총탄 자욱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6.25때 생긴 것으로 숭례문 앞과 뒤 돌 벽에 퍼져 있다.

 

 

 

 

 

 

 

 

 

 

천정의 청용과 황용

 

 

 

 

 

 

 

 

 

 

파수의식 

 

조선시대 밤새 도성을 지키며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군인이다.
수문장이 신분을 확인하는 순장 패를 넘기며 교대의식을 하는데 ..

 

전통의 맥을 이으려는 이런 행사가..

매일 일과처럼 분장을 하고 서있는 이분은 힘겨울 테지만

여기를 찾는 이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장으로 남아 있을터이다.

 

 

 

 

 

 

 

 

 

 

 

 

 

 

 

 

 

 

 

 

행사를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