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수원성 시티 투어../17년4월28일(금)


 

 

 

원시티투어 노선도

 

 

 

화성및 화성행궁을 관광할수 있는 전용버스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紅門)

 1796년(정조 20) 성곽을 신축하면서 준설하고 남북에 각각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 상류에 해당하는 북쪽 수문이다. 성곽 내의 시설물 중 상당수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파괴되었으나 이 부분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었다.

수문은 모두 7개의 석조아치로 만들어졌는데 가운데 한 칸이 약간 넓고

나머지는 아치 너비가 8척, 높이 7척 8치이다.

아치와 아치 사이는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물이 잘 빠지도록 하였다.

아치 위로는 다리돌을 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으로는 벽돌로 낮은 성벽인 첩(堞)을 쌓았다.

 

첩에는 네모난 대포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소포(小砲) 구멍 14개를 뚫었다.

다리 위 북쪽 가까이에 세워진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식(翼工式) 건물로 수문 북쪽의 경계와 감시를 할 수 있도록 사방을 개방하였다.

사다리꼴의 높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두리기둥을 높이 세우고

밑에서 한길 되는 높이에 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남측의 중앙간을 개방하고 좌우 협간은 벽돌로 막았으며,

 좌우 측면에 2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두었다.

기둥머리에는 간단한 초각(草刻)을 한 초익공을 꾸몄으며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椽背天障]으로 하였다.

지붕의 각 마루는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의 머리모양의 장식)와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북측벽에는 건물에서 약간 거리를 띄우고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그 바깥쪽에는 짐승얼굴을 크게 그려놓았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또한, 각 아치에는 쇠로 만든 살창을 설치하여 이곳으로 적이 침입하는 것에 대비하였으며,

 이 수문은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문 주변에는 동쪽으로 언덕이 이어지고 언덕 높은 곳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용연(龍淵)이 있으며,

수문 위아래 흐르는 물 사이로 넓적한 바위가 드러나 있어

 수원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이 건물은 전란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갖추는 동시에

시내를 관통하는 개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군사적·토목기술적·건축미적인 면에서 한국건축의 걸작이다.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각루의 이름이다.

이것은 1794년(정조 18) 수원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을 축조할 때

화성의 동북쪽에 군사지휘소부로 만들었던 각루로,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 위에 있다.

 

 

 

 

각루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중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근대의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ㄱ"자 형태로 조성된 방화수류정은 전쟁시에 사용하는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까지 고려해 한껏 아름다움을 살려 지어졌다.

 

 

 

작은 문이지만 홍예로 만들고 정자의 난간도 한껏 멋을 부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 가야 한다.

 

 


방화수류정에서 내래다 본 수원시내의 풍경

성곽을 따라 가면 장대한 규모의 장안문도 드러나 보인다.

 

 

 

 

북암문(北暗門)

암문(暗門)은 어두울 "암"자를 사용하는 숨은 문이라는 뜻이다.

적군 모르게 아군들만 성 안팎을 오가는 비밀 통로였다.

즉 전쟁이 발생할 경우, 사람, 가축, 수레, 양식 등

 모두 이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수원의 4대 성문의 경우 적에게 쉽게 노출될 위험이 컸던 반면

암문은 성벽의 후미진 곳에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적들이 그 길을 잘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성이 위험해졌을 때 암문으로 전령을 보내도,

증원군을 받으며 비상식량을 공급받기 위한 기능을 가진 곳이다.

그러다가 최후로 암문이 발각되면 흙과 돌로 암문을 막아

통로를 폐쇄해 성과 같게 만들었다.

암문은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 동암문, 남암문이 있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런경관이..

 

 

 

사진을 찍는 여학생들..

엄청 떠들어 대는데도 주변과 어울려 아름답게 보인다.

  

 

 

 

 

북암문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돌아보니..

 

  

 

 

 

화성열차

 

순종황제가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이 탔던 가마를 모티브로 하여

새롭게 탈바꿈한 화성어차는 연무대, 화홍문, 화서문, 팔달산,

화성행궁, 팔달문, 수원화성박물관 등을 순환하는 관광열차이다.

 

 

 

 

장수가 병사를 지휘하던 곳,  연무대 앞에는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잔디가 깔려있는 놀이터 같은 분위기이다.

 

 

 

연무대 앞의 성곽을 둘러본다.

 

 

 

 

동북공심돈이 보이고..

 화성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성곽의 풍경 뿐만 아니라

각종 축성물들이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돈은 성곽의 주변을 감시하며 적군의 동태를 살피거나

적이 공격해 오면 주요 방어시설의 역활을 하고 있다.

 

동북공심돈안의 모습은

 

 

 

 

 동북노대의 풍경..

노대는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쇠뇌를

발사할 수 있게금 높은 위치에 설치하였다.

  

 

 

동북노대 안의 모습은..

전돌로 견고하게 쌓은 노대에서는 쇠뇌를 발사하였다.

쇠뇌는 거대한 석궁 형태의 무기이다.

 

 

수원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등 2개의 노대가 있는데,

노대란 원래 공격해 오는 적을 향해

높은 위치에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구축한 진지였다.

화성 노대는 이곳에 올라 적들의 공격 상황을 측후하여 지휘소와

 성 전체에 오방색 깃발 등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반달 모양의 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다.

전돌을 쌓아 네모 모양의 대로 만들었는데 모서리를 깍아 모를 없앴다.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는 팔각형이며 사각 받침대 안에 쇠뇌를 설치했다고 한다.

 

 

 

 

창룡문(蒼龍門)

수원화성의 동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칭할때에 동문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 18년(서기 1794)에 정조의 부친되는

 사도세자의 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할때 건립되었다.

이름은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蒼)"자가

 방위상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구조는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이며,

 창룡문의 외성인 동옹성은 높이 2.9m, 둘레 17.2m이며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겨냥할 수 있는 총안 14개가 나 있다. 

 

 

 

 

 측면에서 바라 본 문루의 풍경.

홍예 위에  세워진 문루는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다락집이다.

 홍예는 무지개 모양의 돔형 문을 말한다.

 

 

 

성관 안쪽에서 바라 본 창룡문의 풍경.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팔달산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진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였다가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곳 연병장에서는 무예24기 공연을 월요일 휴무와

날씨가 추운 동절기를 제외하면 오전 11시에 약 30분간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수 있는데

우리들은 시간이 없어 지나쳐야 하는 아쉬움을 남겨야 했다.  

 

 

 

 

 

남군영(남군영)

 자용영 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 200명이 살면서 지켰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789(정조 13년)에 처음 지어졌고, 1794년에 증축되었다.

 

 

 

 

좌익문(左翊門)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년 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 "좌익(左翊)"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600여년이 넘었다는 노거수.

화성건설 이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소원지에 바라는 원을 적어 걸어 놓으면 이루어진다는..

 

 

 

봉수당(奉壽堂)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1789년에 완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그 후 1997년에 복원되었다.

정조는 14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낙남헌(洛南軒)

1794년에 완공된 건물로 1795년의 행차시에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유여택(維與宅)

은 평소에 화성유수가 기거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건물이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은1790년(정조 14년)에 건립되어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명칭을 가졌다.

 

 

 

 

해우재는..

미스터토일렛 심재덕은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고자

 30여 년간 살던 집을 허물고 변기 모양의 집을 지었고
그 이름을 바로 해우재라고 하였다.

2007년 11월 11일 완공된 해우재는 화장실이 인간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공간인지를 보여주고 있어

미스터토일렛 심재덕의 화장실에 대한 철학과 신념을 살펴볼 수 있다.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사후 유족이 그의 뜻을 받들어 2009년 7월 수원시에 기증하였고,

수원시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쳐

“수원시 화장실문화 전시관 해우재”로 재탄생시켰으며,

2010년 10월 30일부로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삼풍가든에서 오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