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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

[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 원주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지를 찾아서..//24년6월26일


 

 

 

한낮 온도가 30도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 더위에 이만한 날씨면 얼마나 감사한지를 한낮을 걸어봐야 알 수있다. 

오전 8시에 "한국 전통문화유산의 이해"반 분들이,

원주에 있는 법천사지를 향해 출발한 버스는 10시30분에 현지에 도착한다.

 

시골로 치면 마을 전체가 사찰이었을같은 넓은 터에 지금도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찰 초입이었을 당간지주는 멀리 한켠에 묵묵히 서 있다.

 

 

 

터 중앙에 한쪽 날개를 잃고 서있는 노거수를 만난다.

이곳 불사를 찾아 나름의 기원을 바라는 이들이 향나무 앞에서  손바닥을 비볐을것이고,

그 들을 지켜보면서 묵묵히 버텨왔을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있을것만 같다.

 

 

 

원주 법천사지는 원주시 부론면(富論面) 명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부론면은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등 세계의 도가 접해 있고,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법천사(法泉寺)는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하여 법고사로 불렸으며,

고려 문종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지리·교통상의 장점을 배경으로 중앙정부와의 연결이 용이하였고,

중국으로부터 선진불교사상을 수용하기에 적합했던 법천사는 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국보 제 59호

탑비란 승려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법천사지는 고려 선종 2년 1085년에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것이다. 지광국사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문종까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최고의 승려로 활약하였다.

그 후 1070년, 87세의 나이로 범천사에서 입적하였다.

 

국사탑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것으로 전체 높이는 4.55m이다.

받침돌ㅇ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얼굴과 비슷하다.

특히, 등껍질에 사각형을 여러 개 그리고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한 점이 특이하다.

 

 

 

 

거북머리가 아니고 용머리로 되어 있다.

등에 임금 왕자가 새겨있다.

 

 

 

 

비석 상단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시관에서 이 비의 탁본을 무료로 나누어 준다.

상단부 중앙에 용화수 나무가 있고, 좌우에 천녀가 차와 향을 

들고 오고 있다. 하단부 좌우에는 봉황이 있다.

중앙의 글자는"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을 전서로 새겼다.

 

 

 

글씨는 구양순체이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생동감있는 표현이다.

 

 

 

왕탱이도 집을 짖고 들락날락 한다.

글자 해석보다 벌에 신경이 더 쓰인다.

 

 

 

부도탑이 있던 자리,

1911년 일본 도굴꾼에 의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국내의 여론으로 데라우찌총독이 반환할 것을 명령해 반환되었으나

경복궁 뜰에 두었다가 얼마전에 자료관을 이곳에 건축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체로 기념을 남겼다.

 

 

 

부도탑터에서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유물 전시관으로 이동한다.

이제부터 정오가 가까워지니 더위와 싸워야 한다.

 

 

 

발굴 유물 전시관이다. 

2023년 법전사지 터 옆에 유적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지상 2층 규모의 전시관 앞 쪽으로 예 법천사 입구임을 알리는 당간지주가 보인다. 

 

 

 

내부로 들어가면 1층에 기획전시홀이 있고, 

"무단 반출 그 후 , 112년의 기다림"이라는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해체된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부도탑이 분해되어있고, 10월경 이곳에 복원 예정이다.

 

 

 

 

 

 

석조공양보살상,

법천사지 석조공양보살은 원통형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상호는 턱이 두툼하게 강조된 채 이목구미가 얼굴 중앙에 모여있다.

또한 양쪽 어깨와 팔, 왼쪽 무릎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남아있는

신체 부분을 통해 이 공양보살상이 우슬착지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을 가슴에 모은 공양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청동향로,

향을 피우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걸어서 사용하는 현향로로 추정된다.

손잡이 및 노신이 바닥 부분이 결실되었으며, 노신은 전체적으로 호형이다.

 

 

 

철마,

철로 주조 되었으며, 부식으로 인하여 머리와 몸통부분만 잔존해 있다.

다리 및 꼬리등은 부분 결실 되었다. 말의 안장 및 목 아래쪽에 고삐

부분등이 관찰되며, 전반적인 형태는 법천사지 인근 거돈사지에서 출토된

철마와 양상이 비슷하다.

 

청동제 말,

청동으로 주조한 말 모형으로 꼬리 끝이 야간 절실되어 있다.

머리 부분은 눈, 콧구멍, 입, 목뒤의 갈기 등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몸통 이하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한것이 특징이다.

 

 

 

철제 은상감재갈,

재갈은 말을 부리기 위해 입에 물리는 도구로 철이나

금동으로 제작된것은 많지만, 은으로 상감하여 제조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재갈쇠, 재갈멈치, 고삐이음새등 비교적 완전한 형태이며,

재갈멈치 외면에 초화문을 은상감으로 표현하였다.

 

 

 

비석의 봉황을 수로 표현했다.

 

 

 

금동연화문 원통형기,

금동으로 제작된 원통형기로 일부만 잔존해 있다.

얇은 판을 둥글게 말아 제작하였으며, 청동판에 음각기법을

사용하여 문양을 시문하였다.

 

 

 

 

오찬은 "여주쌀밥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