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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고향마을산책

뻘 속에 묻힌 질메다리 발굴…“복원작업 나서자”

 

 

 

“너는 질메다리에서 주워왔다”
뻘 속에 묻힌 질메다리 발굴…“복원작업 나서자”

 

건립연대가 1920년대로 추정되는 일제가 만든 질메다리.

2007년 3월의 모습이다.

 

   

 

 

서천군의 상징이었던 질메다리(길산교:吉山橋)가 주민들의 기억에서 아련히 멀어져가고 있다. 지난 4월 개축공사를 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질메다리를 헐어내던 중 문헌에만 남아있던 질메다리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 밑 뻘 속에서 석재로 만든 다리의 교각과 상판 등이 발굴된 것이다. 질메다리 중수비와 문헌의 기록, 고증 등을 토대로 질메다리의 모습을 밝혀보기로 한다.  <편집자>

 

 

오일장이 서던 삼수동

<서천군지>에 따르면 길산은 질메다리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는 마을에 개가 있었고 길이 질어서 "질메다리", "질산"이라고 불리다가 "길산"이라 했다고 한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옛말이 전해올 정도이다.

 

이곳은 오늘의 서천읍 삼산1리로 옛날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포구였다. 길산천과 직천이 만나는 곳이어서 삼수동(三水洞)으로 불렸다. 삼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삼수동과 길산리를 합친 이름이다. 여기에 오일장이 섰으며 이웃 한산과 비인 사람들이 와서 거래를 하였다. 뱃길로 여러 산물이 드나들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지도를 보면 길산천이 직천과 만나는 바로 아래에 질메다리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재는 길산천이 이 다리보다 훨씬 아래에서 직천과 만난다. 삼수동에 수해가 잦아 길산천 본류를 마을 아래 하류쪽으로 돌린 것으로 추측된다.


질메다리는 한산과 서천의 경계인 길산천에 놓인 다리로 서천 사람들을 부여나 공주 방면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1729년에 세워진 전남 벌교의 홍교. 길이 27m.

보물 304호로 지정됐으며 지금도 보수하여 사용되고 있다


   

 

 

1703년에 세워진 질메다리

동강중학교 설립자 이하복(1911~1987) 선생은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길산교(질메다리)는 우리 고장에서 제법 이름이 유명한 돌다리였다. 길산천에 돌로 교각을 세우고 그 위를 돌로 연결시킨 다리였는데 상당히 오래된 석가교였다. 이 돌다리는 시멘트로 보수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질메다리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가장 최근의 것이다. 이하복 선생의 자서전에 따르면 길산초등학교(현 길산 사랑의 집)는 일본인 지주 횡산(橫山)이라는 사람의 미곡창고였다. 해방 후 이 창고를 학교로 개조했다는 것이다. 삼수동에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오고 도정공장도 들어섰다. 동양척식회사의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처럼 일제의 쌀 수탈 기지로 되자 질메다리는 볏가마를 실은 우마차가 지나다니기엔 매우 작았을 것이다.
 일제는 이 다리를 헐고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20년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가 옛 다리를 헐고 새 다리를 놓을 때 다리 옆에 놓였을 것으로 보이는 빗돌을 옮겨 미곡창고(현 길산 사랑의 집) 앞에 세워놓았다. 이 비문에 조선시대에 놓은 질메다리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적혀 있다.

마모가 심한 비문에 "康熙四十二年"이란 글자를 간신히 판독할 수 있다. 1703년(숙종 29년)에 세워진 것이다. 이하복 선생은 자서전에 "비문에 의하면 석교를 가설한 사람은 어느 절 스님이었다고 밝혀져 있다. 빗돌의 앞면과 뒷면에는 이 다리를 세우기 위해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라고 쓰고 있다.
관청 이름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민간인이 주도하여 만든 다리임을 알 수 있다.

 

 

   
1703년 질메다리 건립과 함께 세워진 비석. 옛 길산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다리의 건립연도 등을 알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

숙종 29년 질메다리가 민간에 의해 세워지기 이전에 그 자리에 다리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목교를 헐고 석교로 세웠거나 석교를 중수했을 것이다. 왕래가 빈번한 곳임을 감안하면 어떤 형태로든지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18세기 초 숙종연간에 세워진 질메다리는 고지도와 증언 등을 통해 그 모양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질메다리가 등장하는 최초의 고지도는 1745~176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변사인방안지도"이다. 위치 표시만 간단히 해놓은 이 지도에는 다리 이름이 "홍교(虹橋)"라고 되어있다. 홍교, 또는 홍예교는 다리의 한 양태로 교각이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그린 다리를 뜻한다.

 

비슷한 무렵인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에는 다리 이름이 "吉山橋(길산교)"로 표기 되어 있다. 그러나 정조 연간인 1789~179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무지개 모양의 아치 3개가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강경 미내다리

이처럼 교각이 무지개 모양의 아치 형태인 홍예교는 전남 벌교의 홍교나 논산시 채운면에 있는 미내다리에서도 볼 수 있다. 벌교의 홍교는 중수하여 현재에도 다리의 기능을 하고 있고 논산의 미내다리는 1973년 충남도유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질메다리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이 다리를 헐어낸 일제가 다리의 크기를 측정하여 기록해두었거나 사진 기록을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일제가 놓은 시멘트 질메다리의 크기를 감안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다. 수차례 보수를 해오다 지난 4월에 헐린 질메다리는 길이 25m, 높이 4m, 폭 6m였다. 따라서 홍예교 질메다리의 길이와 높이는 이보다 약간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논산 미내다리의 폭이 2.8m임을 감안하면 질메다리의 폭은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내다리와는 달리 질메다리는 상판이 평평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석재는 장항읍 장암리에 있는 전망산과 후망산의 바위와 동일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1년에 세워진 논산의 미내다리는 길이 30m, 높이 4.5m로 호남지방까지 아울러 당시 가장 큰 석교였다고 한다. 이보다 규모는 약간 작지만 30년 정도 먼저 민간의 주도로 세워진 질메다리를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각에서 일고 있다. 안희정 도지사가 지난 6일 서천을 방문하여 마련한 군민과의 대화 시간에 한 주민은 금강 하류지역 주민들의 생활사와 얼이 담긴 질메다리를 복원하는 데 도비를 지원해 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너는 어디서 왔냐? 질메다리에서 주워왔다” 옛날 할머니들이 손주를 무릎에 앉혀놓고 하던 말이다.

 

지난 4월 일제때 세운 질메다리 철거공사시 발굴된 질메다리 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