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 6.25전쟁때 UN군 5,600명으로 중공군 5만명을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치열한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곳이있다.
특히, 프랑스 중장 몽클라르 장군은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중령으로 강등하여
참전한 행위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지평리전투 전적지"를 답사했다.
양평지역은 오늘 전국에서 가장 높은 38º의 폭염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시원하기는커녕 미적지근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오늘 답사에 함께한 분들의 인사말도 있었다.
이해선 CJ전부회장, 지평 막걸리 60통을 우리팀에 희사했다.
박인택감독,
제빵왕 김탁구 등 수많은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지평리 전투의 의미를 설명..
전 KBS 윤희성 다큐 감독,
지평리 관련 동영상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내년이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라"지평리전투"의제작을 기획중이라고 한다.
충혼비,
당시 참전국의 국기가 자랑스럽게 게양되어있다.
묵념은 각자..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서,
상주하고 있는 해설사의 설명으로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보는 시간이 이어진다.
워커중장이 교통사고로 1950년 12월에 사망하자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해서 중공군에 공격적으로 대응했고
지평리전투를 기획하여 승리로 이끌어 냈다.
붉은색 중공군이 10배나 많은 병력으로
UN군을 포위하고 있다.
<선더볼트 작전>
지평리 전투(砥平里戰鬪)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제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 했다.
51년 2월 13일 저녁,
중국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쳐 파상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 날 전투중에 폴 프리언 23영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군력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했다.
이 날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핼기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월 14일 저녁 7시,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고, 그 중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진지내에서는 적군이 우리 진지에 들어와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국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연대장 마르셀 G.크롬베즈대령)을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크롬베즈 구조대>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병연대는,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로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전차대는 6전차대대 D중대와 70전차대대 A중대로 편성되었는데, 6전차대대
D중대는 본래 1기병사단 소속이 아니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중대여서 5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6대대는 M46 패튼을 장비했으며, 70전차대대는 M4A3를 장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 5기병연대는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 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 복구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진형을 갖추었다.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축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두 대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두 대대의 임무는 도로 양측면의 산악지대를 장악하여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반격은 매우 거셌고, 2개 포병 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기갑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하여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무렵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었고, 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블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함께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진격하기로 했던것이다. 공격제대는 M-46을 갖춘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M4A3를 장비한 70전차대대 A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오후 3시,
공겨대는 공격준빌르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라탔다.
160명의 L중대원이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오후 3시 45분,
부대는 공격에 나섰다. 전차 간 간격은 13m(15야드)를 유지했다.
결과,
지평리 동쪽에서 구군 5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공군이 꽹가리를 치며 공격하자 프랑스 대대는
수동식 사이렌으로 그 소리를 상쇄했다.
한국군 100여명이 배속됐다.
배속된 한국군을 카튜샤로 불렀다.
미군 지휘관 풀 프리먼 대령,
왼쪽 허벅지 부상임에도 불굴의 정신으로 부하들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프랑스 지휘관 몽클라르 장군,
중공군 사령관 팽덕희,
적장이지만 부족한 무기와 보급으로 최선을 다해 병사를 지휘한 명장이다.
이후 모택동의 경제정책 실패를 비판했다가 실각하고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프랑스부대 진지,
현 지평역 근방
참호속의 병사,
양평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곳이다.
더운곳도 양평인 듯 오늘 낮 기온이 38도로 전국에서
제일 높았다고 한다,.
클롬베즈 부대 땡크,
별도 공간에 일본군의 잔혹상을 매켄지가 촬영한,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의병"이란 사진이 게시되어있다.
3층 전망대에서, 지평리를 조망해본다.
기념관이 있는 이곳에 중공군이 있었고 바라보이는 남쪽편 시가지가 UN군 진지이다.
상대인원이 열배나 많기에 일부러 개활지 한가운데에
1.6Km둘레 원형으로 진지를 구축했다.
전쟁영웅이다,
6.25때 8240 켈로부대원으로 참전한 용사분이 92살로 정정하시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다.
지평역 옆에있는 프랑스 대대 진지이다.
프랑스 대대 사령부였던 지평막걸리 양조장,
점심은 용문시장가에 있는 "중앙식당"에서,
더덕불고기 산채정식으로 했다.
인당 20,000원인데 불고기맛도 좋고 밑반찬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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