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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

[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 단풍은 오지 않았어도 위풍당당함은 그대로인 백암산,백양사였다..//24년10월23일


 

 

년중 계획으로 단풍철 답사를,

전남 장성 백암산 백양사로 정한날이어서 오전 7시 30분에 출발했다.

외부 손님으로 파스칼 신부님, 유자매님, 프랑스에서 여행온 가족들도

초청하여 함께 했다.

 

 

 

11시 40분에 백양사 주차장에 도착,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더덕, 홍어회무침이 별미였다.

 

 

 

 

주변은 기다리던 단풍은 보이지 않고 푸르름 그대로이다.

앞으로 열흘은 지나야 단풍철로 접어들것 같다.

 

 

 

일주문, "백암산고불총림백양사"

아쉬운대로 국제적인 답사의 한장면을 담고,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이 서 있는 숲길을 지나다 보며,

단풍이 오지 않은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역 기후탓인지 온통 감나무가 보이고

감은 풍년인것 같다.

 

 

 

 

 

 

 

쌍계루와 백학봉을 배경으로한 이 한장의 사진이,

먼곳끼지 와서 단풍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 뒤로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있어

연못물에 어른거리는 쌍계루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백학봉,

 

 

 

 

 

 

 

 

백양사는,

서기 632년 백제 무왕33년(632년)에 여환선사가 창건하여 백암사라 하였다.

덕종3년(1034년)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라 개치하였고, 1574년 환양선사가

중건하여 백양사로 고쳤으며, 주변 일대는  자연경관이 매우 수려하여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고티마 싯다르트가 이런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보리"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이란 뜻이다.

 

 

 

 

 

350년 되었다는 "고불매",

1700년경부터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쯤 떨어진 엣 백양사 앞뜰에다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를 가꾸어 왔는데, 1863년(철종14)에 절을 지를 때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 옮겨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매는 죽어 버리고 홍매만 살아 남았다.

 

1947년에 부처님의 원래 가르치믈 기리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홍매화가 피었을때,

 

 

 

 

이런 장면도,

사찰에는 스님이 있어야 생동감이 있다.

 

 

 

 

쌍계루, 강암 김규진의 글씨이다.

쌍계루에 관련된 역사 속의 인물들은 고려시대의 각진국사,

고려말 이후의 이색, 정도전, 정몽주, 송순, 김인후, 기성진, 최익현 등

많은 만큼 백양사의 명소이다. 이 많은 인물들이 남긴 시들이 쌍계루에 걸려있다.

 

 

 

 

[정몽주 시]

奇題 雙溪樓(기제 쌍계루)

求時今見白巖僧(구시금견백암승):지금 시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보니

把筆沈吟傀未能(파필침음괴미능):붓을 잡고 시를 읊으려 하나 재능 없어 부끄럽네

淸叟起樓名始重(청수기루명시중):청수스님 누각 세워 비로소 이름 소중해졌고

牧翁作記價還增(목옹작기가환증):목은선생 기문 지으니 그 가치 더욱 높아졌네

烟光縹渺暮山紫(연광표묘모산자):노을빛 아득하니 해질녘 산 모습 아름답고

月影徘徊秋水澄(월영배회추수징):달 그림자 어른거리니 가을 물빛 더욱 맑아라

久向人間煩熱惱(구향인간번열뇌):오랫동안 인간사에 번뇌로 시달렸으니

拂衣何日共君登(불의하일공군등):어느 날 속세의 먼지 털고 그대와 함께 누각에 오를까

 

 

 

한국여행에서의 추억이 영원하길,

 

 

 

 

눈쌓인 동틀무렵의 쌍계루와 백학봉,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어느 분이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점심을 한 옆에 있는 "시월애"라는 카페안에

이 사진이 걸려있다.

 

 


 

 

 

 

 

 

 

 

 

 

 

 

 

 

백양사를 떠나면서 법계를 본다,

백양사 법계는 사찰의 경계를 나타내는 석물로 2.5m의 사가 석주가

동쪽과 서쪽 각각 1기씩 서 있다.원래 이곳에는 장승이 서 있었는데

마을사람들과 백양사 스님들이 1924년 장승을 없애고 법계를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