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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踏하다..//24년12월17일


 

 

선정릉역(9호선)에서 하차하여 밖으로 나오면,

테헤란호, 봉은사로, 선릉로, 삼성로로 이어지는 넓은 부지에 안겨있는 선정릉을 만나게 된다.

볼일이 있어 강남에 갔다가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이왕에"하고 선정릉을 돌아보았다.

 

 

 

세계유산답게 년말, 년초를 준비하느라 다들 바삐 움직인다. 

가로수에 전구를 달아매는 작업도 한창이다.

 

 

 

 

썰렁하다. 매표를 하고 출입을 하는 곳이다.

약간의 바람, 영상 2-3도를 오르내리는 날씨가 오히려 목을 움츠러들게 한다.

운동삼아 나온 주변분들 몇명만이 돌아 다니고 있다.

 

 

 

 

안내그림만 보고 있으면,

참,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구나..!를 실감하면서도

이로해서 자연숲을 지키고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할 일이다.

 

 

 

몇그루의  소나무, 주변의 갈참나무군,

다행히도 이번 폭설에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으니

그것에도 감사하다.

 

 

 

 

 

 

 

걷다가 힘들면 쉬었다 가자,

누구 눈치 볼것없고 햇살 따뜻하니

이 또한 이곳에서만이 누닐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그 만큼 쉬었으면 됐다 싶은면 다시 일어나 가자,

걸을 수 있는것만도 행복이다.

 

 

 

선릉, 성종대왕릉이 보인다.

주변은 아파트와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고..

이런게 명당자리인지는 알 수없다.

 

 

 

쓰러진 소나무가 너무 많다.

몇십년, 몇백년을 자랐을 나무들도 자연의 힘에는

어쩔 수없이 저렇게 초라하게 누워 있으니  그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으니 인간의 한계란게 이렇구나..!를,

 

 

 

수복방,

수복방은 능지기들이 능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정자각 동쪽에 지은 집이다.

 

 

 

 

 

 

 

 

 

 

 

 

 

 

 

 

 

 

 

 

 

성종(成宗)은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며, 성종은 13세에 즉위하여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을 거쳐 20세가 된 1476년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성종은 엄격한 배불정책(排佛政策)을 펴는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1475년에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겨억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였다.

 

 

 

 

 

 

선릉, 성종의 세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능이다.

 

 

 

 

조선시대 정형왕후능 조성 당시 또는 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되어 주변에 묻혀있던것이 노출되어 현장에 보존하고 있다.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써

1473년(성종4년)에 선입대내(選入大內)하여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중종과 신숙공주를 낳고, 1530년(중종 25년)에 65세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낙엽이란게,

별 볼일없는게 빛 바랜 낙엽일진데

단풍잎이 붙어있는 저 나무는 석양이 비추는 시간대여인지

그래도 볼만하다.

 

 

 

 

 

 

 

정릉, 중종의 묘이다.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조광조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중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기도 했다.

 

 

 

중종은 원래 서삼릉 내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묻힌곳에 합장하였으나, 1562년(명종17)년에 중종을 현 위치로 

천장(遷葬)하였다.

 

 

 

코앞에까지 건물들이 다가왔서인지

앞을 보고있으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 사진이 아래에서 보이는 전부다.

 

이곳으로 천장한 7년뒤,

권력을 장악한 제2계비 문정왕후는 풍수상 수파(水破)가 불길한 자리에

선앙을 모실 수 없다하여 문정왕후가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천장한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능을 천장하고 난 후에 이곳의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齋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補土)하기에 큰 비용을 들였으므로 능 터를 다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결국 문정왕후는 현재의 태릉에서 혼자 단릉(單陵)으로 장례를 지내게 되었다.

 

 

 

 

 

 

 

예감,

제향에 사용 된 축문을 태워서 묻는 돌구덩이다.

 

 

 

 

 

 

아타까운 장면인,

쓰러진 소나무 몸통은 없어지고 남은 뿌리 부분만이 남아,

 

 

 

 

수령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그 세월이 너무도 아쉽다.

시간, 세월, 아쉬움을 남긴채 릉 답사를 마누리했다.

예기치 않았던 오후 늦은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