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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봉은사를 둘러보니 이런곳도..//25년12월5일


 

 

 

봉은사에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가 설치되어있다.

이곳을 방문한 많은이들이 트리를 배경삼아 기념을 담고 있다.

봉은사는 통일신라 원성왕시절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당시 사찰명은 견성사(見性寺)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능침사찰'이 되면서 많은 땅을 하사 받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으로 현재 이름의 봉은사(奉恩寺)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선종 수사찰이 되어

과거 제도 중 승과 시험을 보는 곳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유생들의 견제를 받기도 했던 곳이다.

 

봉은사 대웅전은 팔작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1939년 소실되었고 현재의 대웅전은 1982년에

중창된 것이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임금에게만 장식하는 용을 조성해 놓았으며,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대웅전 앞에는 3층 석탑이 있고, 양쪽에 석등이 있다. 3층 석탑 앞에는 초를 공양하는 단이 마련되어

있고, 양 옆으로 초를 꽂는 향로가 있다.

 

 

 

대웅전 중앙에는 금도금을 한 목조 삼존불 좌상이 모셔져있는데,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있다.

 

 

 

 

 

뒤로 올라가 보니 봄이면 홍매화를 찍는 사람들로 붐비는 매화나무가 

외롭게 가지만 늘어뜨리고 있었다.

 

 

 

올 봄에 이곳에서 매화를 촬영한 사진이다.

 

 

 

 

 

1855년 71세가 된 김정희는 병이 깊었다. 현판을 쓸 때 자신의 명이 3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판전의 글씨는 병약한 늙은이가 겨우 내려 쓴, 모든 것을 내려 놓은 듯한 힘없는

글씨라고 한다.

 

그가 전성기때 쓴 글자를 모사한 대웅전 현판 글씨와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판전 현판의 글씨를 비교해

보니 한 사람이 쓴 글씨라는게 믿어지지 않게 차이가 있다.

 

 

 

 

판전각옆에는 두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비석이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조선후기의 유교는 필요악으로 전락했다.

마치 고려 말 타락한 불교가 고려의 패망을 재촉한것처럼 조선말은 유교가 그랬다.

유교의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개척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쥐자마자 한 일이 유교의 온상인

서원철폐 작업이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흥선대원군은 불교를 지원했다.

 

그 중의 하나가 왕실 땅이었던 봉은사 부지를 봉은사에 희사한 것이다. 이에 봉은사는 문정왕후가 선택한 수도산

자락의 혈이 5개나 있는 명당 자리를 옮기지 않고 현재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봉은사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입은 은혜는 영원히 잊지 못하는 영세불망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서 영세불망기 비석을 세워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추사 김정희와 흥선대원군 비석이 나란히 배치하였을까? 헌종대에 흥선대원군은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있었다.

추사는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의 스승이었는데 난을 치는 재주를 칭찬하기도 했다 한다.

이런 추사와의 인연으로 추사가 죽기 전에 자주 왕래하던 봉은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비석만이라도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니 스승과 제자가 해후한 것 같아 보인다.

 

 

 

 

 

종루에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四物)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고, 

법고는 가축이나 짐승을 제도하며, 운판은 새들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목어는 물고기들의

영혼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