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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나라뜰헤매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친구네와 오후를 같이 했다..//26년6월2일


 

 

 

우연치 않게 전화 통화가 이루어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희만친구네와 만났다. 정문에서 들어오는 계단에 카네이션이 보기 좋게 피어있다.

 

 

 

 

 

 

 

k컬쳐 바람 덕분에 2025년 연간 관람객이 세계 3위라는 안내판이 게시되어있다.

1위 루브르박물관, 2위 바티칸박물관, 3위 국립중앙박물관, 4위 영국박물관 순이다. 

 

 

 

1층검색대를 통과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석탑, 그 위용에 몸이 작아지는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13.5m 높이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이 탑이 왜 박물관 안에까지 왔는가에 대하여 지난 700년 여정이 궁굼하다.

'경천사'는 개성 부소산 기슭에 자리잡았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는데,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찰로 있다가, 20세기 초에는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바로 여기에 있는 십층 석탑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1348년 친원파 권문세족들이 세운것이다. 탑 1층에는 원 황실의 장수를 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까가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언론인 E,베델과 헐버트의

노력, 우리 국민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1918년 환수되었다.

 

 

 

 

 

 

 

 

 

 

 

 

토기로 읽은 조개무지의 시간,

흙을 빚어 무늬를 넣은 토기는 오랜 시간 계속 만들어 졌다. 그래서 토기의 모양과  무늬를 살피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의 토기들도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오른쪽 토층에는 사람의 흔적이 있는 세 단계 문화층이 있다. 가장 일찍 쌓인 아래 층에서는

점토를 덧붙인 토기가 나왔다. 중간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그 위 층에서는 점토 띠를 아가리에

둘러 붙인 늦은 시기의 도기를 확인했다.따라서 동삼동 조개무지는 기원전 6천 년부터 기원전

2천 년까지 오랜 기간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검의 상징성,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석검은 청동기시대 하면 대표적으로 떠 오르는 물건 중 하나이다.

검몸만 만들어 자루에 끼운 것, 자루와 한 몸으로 만든 것 등 여러 형태의가 있다.

일부 과장된 크기의 검은 실용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에서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큰 집자리나 일부 무덤에서만 출토되며, 거대한 고인돌의 덮개돌 등에

검 그림을 새겨 넣기도 해 예사 물건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철기 문화의 발견,

철은 고대 사회 형성과 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석이나 강가 모래에서 철을 뽑아 내어 도구를 만드는 일은 청동을 다루는 것 보다

훨씬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철기 제작은 높은 기술 수준과 함께

이를 유지 관리하는데 더 성숙한 사화, 정치 체계가 필요했다.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고, 전국적으로 제작,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처음에는 주조기술로 만든 공구,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단조 철제 무기나 말재갈 등 여러 종류의 철기를 만들었다.

 

 

 

 

 

 

 

 

 

 

 

 

 

 

 

 

 

539년에 만들어진 불상,

 

 

 

 

 

 

 

치미(鴟尾)-부여 왕흥사 터

치미는 기와 건물 지붕의 용마루 양 끝에 자리한 큰 장식 기와를 말한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闢邪)의 의미를 지닌 신성한 새 또는 물고기의 형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왕흥시 치미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치미로,

사찰에서 승려들이 묵었던 방으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해 위, 아래로 잘라낸 후 가마에서 구워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의 치미는 상부, 북쪽의 치미는 하부만 남아 있어서 각각 3D 기술을 통해 복원하였다.

지붕 끝에 얹혀 날아갈듯 한 생동감 있는 모양에 연꽃무늬, 구름무늬, 풀과 가자무늬 등을

새겨 넣었다.지붕의 장식을 위엄을 갖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기와 장인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항복을 호성공신으로 삼는 교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모신 공로를 기려 이항복을 호성공신 1등으로

삼는다는 국왕의 문서이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한호가 썼다.

선조의 피란 때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국왕을 호위하였고 명의 지원병 요청을 

주장했다.

 

 

 

이항복 종가에서 기증한 문화유산,

 

 

 

이세창의 품계를 사후에 높여 내린 교지,

 

 

 

오시복을 호조판서를 임명하는 교지,

 

 

 

평산신씨 계보(平山申氏系譜),

평산신씨 가문의 족보로, 1873년(고종10)에 간행되었다. 26권 15책의 완질본이다.

1책에는 서문, 발문, 범례, 서발, 사적, 묘도, 계보를 수록하였다.

서문은 조선 후기에 활약한 무관 신헌(1810-1884)이 작성했다.

2책에는 언행록, 산도, 범례, 희공파 계보, 3-4책은 밀직공파, 6책은 봉산윤공파,

장합공파, 현령공파, 7-15책은 문희공파 계보로 구성하였다.

 

 

 

백자항아리,

재일교포 이병창(1915-2005) 선생은 일본에서도 이름난 도자기 소장자로,

수집한 도자기를 오사카에 있는 동양도자박물관에 기증하면서도 제일 아끼던

이 달항아리는 고국에 보냈다.

달항아리는 대개 높이가 40cm 이상으로 전체를 한 번에 성형하기 어려워 

위아래를 따로 만든 후 붙여서 완성한다.

따라서 몸체 중앙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있으며, 완벽한 원형이 아닌 자연스럽게

둥근 형태를 보인다. 

 

 

 

백제 청와 숙인 해평윤씨 묘지,

 

 

 

안중근의 글씨,-복제품

 

 

 

 

 

 

 

 

 

 

 

대나무와 난초,

 

 

 

바위에 돋아난 난초,

 

 

 

 

 

 

 

 

 

2층에 있는, 반가사유상,

 

 

 

3층에 있는, 청동 물가풍경 무늬 정병,

청동을 쪼아내고 은선을 끼워 만든 은입사 기법으로 만든,

버드나무와 정수를 통해 심상의 위안을 삼는 수단으로 삼았다.

 

 

 

 

 

 

 

 

 

길 위에서 마주치다(路上過顔),

어린 두 아들과 여정에 오른 부부곁으로 나귀를 탄 선비가 스쳐 지나간다.

부채로 슬며시 얼굴을 가린 채 장옷 쓴 부인을 넌지시 훔쳐보는 선비의 시선이 흥미롭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 이를 향한 타인의 호기심이 교파하는 순간을 잘 포착했다.

 

 

 

씨름(相撲),

두 사내가 서로를 넘기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둥글게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시선은

승부의 순간에 쏠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반면 씨름꾼에게 등을 돌린 채 홀로 여유롭게

엿을 파는 아이는 화면에 여유를 준다. 대조적인 두 모습은 당시 씨름판의 생생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서당(書堂),

한 아이가 훈장에게 회초리를 맞은 듯 바짓단을 정리하며 훌쩍인다.

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훈장과 이 상황을 지켜보는 친구들의 표정이 익살 스럽다.

김홍도는 측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이 장면을 표현하여 인물들의 다채로운 표정을

모두 담는 동시에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가운데로 모았다. 엄격한 서당 안에서 흐르는

인간적인 정과 해학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동 봉정사 괘불,

조선 1710년, 비단에 색,

화면 아래쪽에 적힌 기록에는 괘불을 만들때 참여한 166명의 이름과 시주품 목록,

담당한 업무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