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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공주황새바위성지를 찾아서../대전교구/ 14년5월27일

 

 

                   [대전교구]                                     주황새바위성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6-1>

 

-흑석동성당 신자들 공주황새바위성지를 방문하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

 

 

 

 

 

 

 

 

 

 

 

 

 

 

황새바위에서 바라본 황새바위형장터 

현재는 주택가이지만 주변이 형 알려지고 있다.

 

 

 

 

공주 황새바위 순교 성지는 공산성의 서문 건너편,

 왕릉의 입구 도로 곁 작은 구릉을 가리킨다.

천주교 박해시 신도들의 순교지이었으며,

 순교자들의 무덤으로도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는 초기 천주교의 전파과정에서

천주교세가 가장 왕성하여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

공주지역에서 특히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공주지역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던 이유는

충청감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공주지역에는 1603년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어, 충청감영의 관찰사(감사)가

행정이외의 군사권과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에 들어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공주를 포함한 충청도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된 신도들을 공주 감영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혹은 우영(右營)의 옥에 투옥하였다.

투옥된 신자들은 즉시 영문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고,

배교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황새바위는 공주감영이 순교자들의

공개 처형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순교자들의 매장지로도 이용되었다.

1801년 2월 28일에는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로

 충청도에 처음으로 전교를 시작한

이존창(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외조부)이

서울에서 환송돼 황새바위에서 참수되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황새바위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이 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확인된 순교자만 337명이며,

미확인자까지 합치면 거의 일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황새바위 성지 입구 표지석

 

 

 

 

 

 

 순교기념관으로 가는 길과 순교탑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예수님상

 

 

 

 

 

 

 

2층성당으로.. 

 

 

 

 

 

 

 내부모습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 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 둔다."

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흘림이 계속되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순교탑(殉敎塔)

순교 선열들이 하늘나라를 얻기 위하여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몸을 파기하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 진리만을 따르신 높은 뜻을 기리고 본받기 위하여

 한국교회 200주년이 되는 해에 이 순교탑을 세우다.

 

순교탑 앞에는 "교자의 목을 매던 형구(刑具)"가 놓여 있다.

 



 

 

 

 

 

 

무덤경당으로 들어가는 돌문,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순교했던 12사도를

 의미하는 12개의 자리갯돌

 

 

 

 

 십자가의 길

 

 

 

 

 

 

 

 

 

 

성모동산

십자가의 길 중간 순교탑 아래에  공터가 있고 성모님 상이 있다.

 

 

 

 

성당 윗쪽에 있는 몽마르뜨 카페에서.. 

 

 

 

 

 

 

 

 

 

 

 

 

 

 

야외성당

돌제대를 둘러싼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에

여기서 순교한 사람중 문서로 남은 337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