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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당고개 순교성지../서울교구

 

 

              [서울교구]                                    당고개 순교성지

<서울 용산구 신계동 56>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며,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고 거룩한 순교 성지다.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기해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음력)에 걸쳐

이곳에서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당시 당고개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다른 형벌로 죄를 지은 죄인들은 처형한 적이 있었다.

 일반 신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사제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을 앞두고 상인들이 닥쳐올 설날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다.

 

 

 

 

1839년 12월 27일에는 박종원(朴宗源, 일명 이선, 1792~1840,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권진이(權珍伊, 1819~1840, 아가타),

이경이(李瓊伊, 1813~1840, 아가타), 손소벽(孫小碧, 1801~1840, 막달레나),

 이인덕(李仁德, 1818~1840, 마리아),

그리고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모친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 7명이 순교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최영이(崔榮伊, 1818~1840, 바르바라),

이문우(李文祐, 일명 경천, 1809~1840,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한 9명이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이로써 당고개는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 후 6년 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를 향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서 이곳에 수레를 멈추고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풀어진 상투를 포졸 하나가 다시 묶어 주었고,

 김대건 신부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처형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시성식 후 용산구 신계동 1-57번지에 있는 문배산 마루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고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주변 아파트 건립 공사로 기념비는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가 정리된 후 2011년 다시 성지가 조성되었다.

 

 

 

 

 

 

 

 

 이성례 마리아의 모성애와 순교 정신
하느님의 종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는

성인 최경환(崔京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崔良業, 鼎九,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시다.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한 집안 사람이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진후 비오에게 시집가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이 마리아는 18세 때 최경환과 결혼하였고 서울로 이주하였으나

외교인들의 괴롭힘으로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등지로 이주하였다가

 경기도 과천(果川) 수리산에 정착,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결혼하여 대가족이 살면서도 이 마리아는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혜롭게 잘 꾸려 나갔으며,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공경하고 순종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31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도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

 1840년 1월 31일(음 1839년 12월 27일)당고개[堂峴]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정구(鼎九, 최양업 신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 스테파노였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당고개에서 순교한 10명 중 9명이 성인품에 올랐지만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되어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례는 어린 자식들을 거느린 어머니의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젖먹이 아들 스테파노의 죽음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어린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젖먹이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리아는 자신의 본래 마음과는 달리 아직 살아남은 자식들의 생계가 걱정되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최양업 신부의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다른 기록들은 배교 후에도 감옥에서 풀려나오지 못하고 바로 형조로 옮겼다고 전한다

《시복자료집 제5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08).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어머니를 치명터에 보내는 네 형제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차남 희정(羲鼎, 장남 최양업 신부의 바로 밑 동생)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를 찾아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 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사 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의 합치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로 끌려 나가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딸이며 위대한 어머니인 마리아는 이제 하느님의 종 124위중의

한 명으로 시복시성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들 이야기
당고개에서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후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후일담을 셋째 동생인 최우정 바시리오의 큰아들 최상종이 1939년에 기록한 내용과

 넷째 동생인 최신정 델레신포로의 아내 송 아가타(1838~1930)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은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인이 되었는데

아들 최인주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부인 이씨(이존창의 누이)는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청양 다락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 최인주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최영렬, 최영겸, 최영눌이다.

최영눌이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다.

 삼 형제는 나중에 서울에 와 살다가 박해로 도피하게 되는데,

첫째인 최영렬은 목천 서덕골, 둘째 최영겸은 용인 한덕골에 와서 살다가 골배마실로,

최경환은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1836년 15살의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3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담뱃골의 최경환,

 이성례 부부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목천 서덕골 큰 아버지(최영렬) 댁과

 한덕골 작은 아버지(최영겸) 댁에 나누어 의탁하였다.

 그리고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집에 부탁하였다.

1849년 큰형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최 신부는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최영겸 집에서 동생 사 형제를 만났다.

 그때 페레올 주교가 최 신부의 거처를 진천 동골 공소로 배정하여 그곳으로 떠났다.

몇 년 후(1853년경 추정) 최 신부는 열심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가 정숙함을 알고 두 동생과 결혼을 시켰다.
첫째 동생 최희정 야고보는 박해 기간 세 어린 동생을 데리고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에 대한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말년에 충북 진천군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최희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다.
둘째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는 사람됨이 비범하고 성정이 걸걸하여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성품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슬하에 딸만 둘 두었다.

후에 경기도 광주군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 후 집신 장수가 된 두 내외는 무사히 박해 시대를 넘겼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이 수기의 주인공 빈첸시오다.

 병인박해 이후 10년 가까이 신발 장수를 하던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 56세 정도에 당시 유행하던 악질로 7월 7일 고백의 기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막내 동생 최신정 델레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 후

최 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에서 살다가 몇 해 후 최 신부의 권유로

 다시 안양의 담뱃골 옛 고향으로 이사하였다.

종종 최 신부가 그곳에 들르면 부친 묘에 올라가

 묵주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중에 심해지는 박해를 피해 광주군 함박동에서 살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신하고 구걸을 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빚을 내었지만 실패하고,

 어느 날 읍내 저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자료: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장영돈 편저)에서 발췌 요약] 

 

 

 

 

 

 

 

 

 

 

 

■  순교자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
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박종원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

어머니와 함께 매우 궁핍하게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범(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입국한 뒤 회장직을 맡아 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해 있던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에 체포되었고,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홍병주 베드로(1798∼1840)
서울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난 홍병주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자랐다.

 조상부터 지켜 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동생 홍영주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9월말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고문을 당한 뒤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下官)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어 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하였다.


 성 홍영주 바오로(1801∼1840)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는 충청도 내포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형 홍병주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뒤 9월 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1801∼1840)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과 혼인하였으며,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성체를 모시고부터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6월, 손소벽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사위 조신철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포청에서 주리 세 차례,

태장 260대를 맞는 혹형을 당하였으며,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문(刑問)을 당하였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이경이 아가타(1813∼1840)
동정 순교자인 이경이는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혼인하였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는 그 혼인을 무효화시켰다.

그 뒤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에게 부탁하고

 상경하여 한영이, 권진이 모녀의 집에서 살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함께 탈출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었고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이인덕 마리아(1818∼1840)
동정 순교자인 이인덕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6월 어머니 조 바르바라, 언니 이영덕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성녀 권진이 아가타(1819∼1840)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와 함께 입교하였다.

 13세경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뒤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는데,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해 7월 17일, 같이 살던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옥살이 중 한 차례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이문우 요한(1809∼1840)
‘경천’으로도 불렸던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5세 때 부모를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독신으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양모의 뜻에 순종하여 혼인하였고,

몇 년 뒤 아내와 두 자녀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고 범 주교를 도와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던 중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이때에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며 오히려 당황하는 포졸들을 재촉하여 포청으로 갔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진 고문을 참아 낸 끝에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1818∼1840)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과 어머니 손소벽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20세 때 조신철과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친정에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주리 두 차례,

태장 260대의 혹형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문을 이겨 냈다. 1840년 2월 1일 홍영주,

 이문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녀 권진이 아가다,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 이경이 아가타, 성 이문우 요한,

 성녀 이인덕 마리아,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성 홍병주 베드로, 성 홍영주 바오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박종원, 홍병주, 홍영주, 이문우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전교에 대한 열의를 키우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최영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 우리 교회 내 모든 가정주부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1801∼1840)  <하느님의 종 125위>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8세 때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수리산 교우촌에서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1

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