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명동성당을 다녀오다../서울교구/14년8월4일

 

명동거리를 지나..

 

 

 

 

 

 

 

명동 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에 도착하다.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수표교의 이웃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며, 명례방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명동 성당이 설정된 것은 1882년경으로 알려졌지만

이곳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0여 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해 초겨울부터 수표교(현 종로구 수표동)의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현재 명동 부근인 명례방 소재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 1751~1786?, 토마스)의 집

(현재의 명동 성당 일대)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정약전,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부자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열었는데 이로써 처음으로 조선 교회를 창설하였다.


명동 성당 건립은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며 시작되었다,

 당시의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는

우선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 학당(인현학교, 한한학교 등으로도 불림)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이후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 이를 마무리 지었다.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하여 고정시켰다.
 성당의 설계와 공사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아 진행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지하 성당은 성당 제대 하부에 위치하여 예배 장소와 성해 안치실로 쓰이는 곳으로,

 성당 건립 초기에는 9개의 제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현재 명동 지하 성당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와

 성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성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의 유해 일부와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에 시성된 성 김성우(金星禹, 禹集, 1795~1841, 안토니오),

성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및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의 유해와

1839년에 순교한 무명 순교자 2명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지하 성당은 모두 5명의 성인과 4명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