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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고향마을산책

천방산의 사찰들..

 

 

 

 

 

 

 

천방산의 사찰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의 주둔지 천방산”

천방사·대둔사·망덕사…세 사찰이 있었다.

현종5년 승려들 반란으로 불에 타

 

1991년 설립돼 지금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천군향토문화연구회(회장 박수환 전 한산면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는

 지난 5일 회원 10여명이 참여하여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사료위원)의

 안내를 받으며 천방산 주변을 답사하고 천방사 터와 음적사 등을 둘러보았다.

<뉴스서천>은 이들과 동행하며 천방산에 얽힌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편집자>

 

 

<천방사 터. 시초면 초현리 절골에 있다.> 

 

 

천방산은 본래 1000개의 방이 있다하여 천방산(千房山)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천방산(千方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천방산 아래에 천방사가 있었는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기벌포에 상륙 천방산에 아래에 정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기와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천지가 캄캄하였다.

 소정방은 산신령에게 기도하기를,

만일 안개를 활짝 개게 해주면 절 1000채를 세워 부처님을 받들겠다고 하자,

 곧 안개가 걷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서 두루 살펴보니 지세가

너무 좁아 절 1000채를 도저히 세울 수 없었으므로,

 돌 1000개를 배치하여 절의 형태만 만들고

 법당 1동을 세워 천방사라 불렀다고 한다.

구전돼오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상당히 근접해있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서천군 조에

“천방산에 천방사와 대둔사, 망덕사의 세 절이 있다”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천방사 터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편>


 

소정방이 지었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고

금강 하구를 지키는 요충지임을 감안하면

 본래 그 자리에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사시에 승려들은 군대 조직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천방사는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임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알 수 있다.

현종실록 5년조 기사에 천방사의 승려들의 민폐가 심해

관에서 이들의 토벌에 나서자 “절의 승 수백 명이

조총이나 활을 가지고 험준한 곳을 의지하여 저항하였으며,

그뒤에는 화약으로 절을 불사르고 또 미워하는

 관인(官人)의 집을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승광 박사에 따르면 “천방사는 궁가(宮家)의 소속으로

위세가 대단해 민간에 적폐가 심해 도마천을 건너는

 백성들에게서 인두세를 받아낼 정도였다” 한다.

천방사 터를 확인하기 위해 시초면 초현리 골짜기로 들어섰다.

 옛날에는 마산과 판교를 잇는 큰 길이었다고 한다.

이 골짜기를 절골이라 부르는데 중간 부근에 민가가 1가구 있고

여기서 우측으로 올려다보면 천방산이 우뚝 솟아있다.

 천방산 중턱 조금 못미치는 부분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이 천방사 자리라는 박수환 회장의 설명이다.

 천방사 터로 오르는 길에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없이 발견됐다.

 

소정방이 덕물도(오늘의 경기만 덕적도)에서

신라왕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과 함상에서 회담을 하고

 사비성에 이를 때까지 20여일의 시일이 걸렸는데

소정방이 기벌포로 상륙하여 천방사를 중심으로 진을 치고

부여 임천의 가림성(오늘의 성흥산성)의 백제 주력부대와

대치하며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데

박수환 회장과 유승광 박사의 견해가 일치했다.

 

<음적사. 수습된 석탑의 부분들을 쌓아놓았다.>

 

 

 

 

천방사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능선을 넘으면

 바로 태고종 소속의 음적사(陰寂寺)이다.

 문산면 신농리에 있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대둔사(大芚寺)였다.

박 회장에 따르면 목은 이색 선생이 대둔사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둔사라는 이름도 군사들의 주둔지였음을 말해준다.

대둔사는 언제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다.

 깨진 기왓장들은 축대로 사용되었고

 규모가 꽤 커보이는 석탑의 일 부분들이 마당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음적사에서만 볼수 있는 희귀한 자료가 있다.

석가모니가 41세 되던 해의 모습을 제자인 부루나 존자가 그린

 그림의 사진인데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중국에서 발견한

 원본은 현재 영국의 영국제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망덕사(望德寺)는 판교면 만덕리에 있었던 사찰이었다.

여기에서 만덕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한다.

작은재 공소에서 남쪽 골짜기 방면에 절터만 남아있으며

 인근에는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있었다 한다.

박수환 회장은 이처럼 흩어져 잊혀져 가고 있는

 서천의 문화유적을 조사해 정확한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는 일이 향토문화연구회가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둔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빗돌>

 

 

 

 

<음적사에 보관되어 있는 부처님 초상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