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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고향마을산책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천방사 승려 변란 사건

 

당나라 소정방의 이야기가 얽힌 천방사는

천방산 남쪽 아래 시초면 초현리 절굴로 비정되고 있다.

 지금도 현장에서는 깨진 기와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서천에 서 가장 큰 절이었던 천방사는 조선조 현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서천지역의 불교 세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약하다는 말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그러나 조선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 한산군 불우조에 일광사(日光寺), 숭정사(崇井寺), 고석사(孤石寺), 회사(回謝)가 있었다.

또 옛 서천군 불우조에는 지원사(祗園寺), 대둔사(大芚寺),

망덕사(望德寺), 천방사(千方寺)가 있었다.

 비인군 불우조에는 훈일사(訓逸寺), 보현사(普賢寺), 현풍사(玄風寺),

성불사(成佛寺)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세가 약한 편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또한 최근 서천군 종천면 신검리 개복사지 발굴 결과

백제시대 사지, 와당, 토기가 발견되어

서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 보다 높다 .

특히 서천군 천방사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 수도 사비를 공격하기 위하여

 금강하구로 진입할 때 얽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그 연원이 짧은 사찰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문헌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사찰 명칭이 수록되고

 <조선왕조실록> 현종 5년(1664) 조에 천방사 승려들의 변란사건이 등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백제 말기 천방사의 전설을 살펴보고

 1987년 서천 수해 때 발견된 유물을 통하여 천방사의 위치를 선정하고

조선 후기에 일어난 천방산 승려 변란 사건의 원인과 경과를 고찰하고자 한다.

 

 

천방사 전설과 백제 말기 상황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망할 때

당나라 소정방은 기벌포(伎伐浦)를 통하여 백제 사비성을 공격한다.

 이때 소정방은 660년 7월 10일까지 사비성에서

 신라 김유신을 만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둘러 기벌포를 통하여 상륙한 다음 사비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기벌포의 상황은 해안이 진흙탕이어서 빠지므로

다닐 수 없으매 버들자리를 펴 군사들을 나오게 하였다.

이때 상황을 전해주는 천방산 전설이 서천지역에 전해오고 있다.

소정방 군대 5만명이 기벌포에 도착하였는데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앞으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에 다급해진 소정방은 부하를 시켜 묘책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이때 소정방의 부하들은 둑방을 거닐던 도승을 만났다.

도승에게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전진하려고 하는데 안개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 하니 천일제(千日祭)를 지내라고 하였다.

이에 소정방 부하들은 소정방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천일제를

지내면 전쟁이 끝나겠다며 한탄하여 다시 한 번 도승에게 방책을 물어 오라하였다.

 이때 도승은 소정방을 나무라며 소정방 부대원 1000명 만 선발하여

 막집을 짓고 기도를 하면 천일이 되지않겠냐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소정방의 부하가 소정방에게 1000일 기도의 방법을 보고하자

 그렇게 천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막집을 짓고 하루저녁을 기도하자 안개가 걷혔다.

 소정방은 안개가 걷히자 사비성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사람들은 소정방의 부하 천명이 기도한 방이 있는 산이라고

하여 천방산이라고 하였고 그 절을 천방사라고 하였다.

 


천방사의 위치

 

  

 

천방사(千方寺)는 시초면 초현리 절굴로 비정이 되고 있다.

 천방산 자락에 위치한 대둔사, 망덕사는 어느 정도 절의 위치에 대하여 동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천방사는 음적사가 있는 곳이라고도 하고 시초면 초현리 절굴이라고도 한다.

 초현리 절굴에서는 1987년 수해가 발생했을 때

부도 일부가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시초면 초현리 절굴은 출토 유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아직 전면 발굴을 하지 않아서 뚜렷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천방사 승려 변란의 경과 

조선 현종 때 서천 천방사 승려들의 변란사건 전말은

일부 구전 설화로 전해지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로 확인되고 있다.
이 사건은 현종 5년(1664) 12월 13일조 기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사건은 서천 천방사(千房寺)의 승려들이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이 한산 군수 신숭구(申嵩?)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지형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저항한 사건이었다.

이에 화약으로 천방사를 불태우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

 이익한이 그 소문을 듣고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공주 영장 양일한을 한산에 보내 공격하여 붙잡게 하였다.

그런데 양일한은 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그 관할 구역이 아닌 임천 고을에 달려가 군병을 징발하였고,

또 가둬 놓은 승려에게 애당초 명백히

 자백을 받아내지 아니하고 곧장 효시할 것을 청했다.

그 당시 한산과 서천 두 고을의 유향소 색리(色吏)에게 캐물은 정황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즉 처음에 순찰사가 절의 중을 체포하라고 분부한 것으로 인해

중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세 떼로 나누어 산에 올라가 떼지어 모였다.

 

그런데 당시 양일한은 공을 세우고자 하여 절의 중 3인을 잡고

혹독히 형문을 가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게 하였다.

그리고 군인으로 하여금 그 절을 에워싸 중을 만나면 곧 죽이게 하였다.

 심지어 중이 자백한 말까지 거짓으로 만들어 뒷날 증거로 채택되도록 꾸미니,

한 도의 사람이 다 놀라며 분하게 여겼다 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당시 희대의 큰 사건이었고,

이 일로 감사와 영장은 문초를 당하였고.

 현종 6년(1665) 2월 12일 한산 군수 신숭구는 파직당하게 되었다.

1665년 천방사 변란 사건으로 절의 우두머리 석준 등이 절에 불을 지르고

미워하던 관리 집을 공격하여 천방사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정 공론을 장악하고 있던 송준길 또한 단호한 대처로

천방사를 헐어버리게 함으로써 천방사는 사라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천방산 변란 사건은 승려들이 왕족의 원당으로 힘을 과시하며

절을 운영하여 왔으나 서천 군수 이무의 상소로 그 권한이 제한 당하자

 변란을 일으켰지만 충청감사, 영장 한산군수에 지휘 책임을 묻고,

 서천의 오랜 전통 사찰인 천방사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유승광(공주대학교 객원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