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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산이좋아/한양도성길을

삼성산에 있는 천주교 성지길따라../18년7월21일(토)

    

 

 

 

 

여름이라 하여도 일주일내내 34~5도를 넘는 더위가..

 

몇주 계속되는건

기상관측 시스템이 도입된게 1907년이니

올해로 111년이 되는 해이다.

아마도 올 여름더위는 기계적인 기록상으로 최고를 계속 경신할것 같다.

 

2018년 7월 21일 토요일, 36도까지 오른다는 예보를 듣고

더위도 피할겸 석수역에서 내려 자주 오르는

 삼성산둘레길을 탐하자고 호친구와 약속을 했다.

 

그런데 지하철안에서 기동친구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지만

산행을 같이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산에 오르기전 마을 뒷쪽으로 채전밭이 있고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정성스레 가꾸는 농작물들..

 

상추, 고추, 가지, 호박등의 어린 싹들이 탐스럽게 자라는 모습을 봐왔는데 

이제는 수확한 농산물을 밭옆에 진열하고 판매하고있다.

 

비닐봉지에 넣은 한개가 1,000원씩이니

이곳을 지나는 산우들이 믿고 사가는 풍경이 정겨웁다.

 

 

 

 

 

 

 

 

 

맹위를 떨치는 이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야생화는 꿋꿋이 자태를 뽐내고 있어

그 앞을 지나는 우리에게 기쁨를 주고 있다.

 

 

 

 

 

 

평소같으면  지나쳤을 약수터..

오늘은 사막에서 오아시스 만난격이다.

 

 

 

 

 

이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면서 보니..

6월 18일에 도도공주 이름으로 쪽박에 써있는 글귀가 보인다.

새겨논 이름의 주인공한테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 산중 약수터에 사소한것이지만 남을 위해

배려를 할수 있는 아이디어를 냈다는것에 감사를 표한다.

 

 

 

              

   

 

호암늘솔길은 빽빽하게 들어선 잣나무숲길에 계곡따라

불어오는 솔내음을 맡으며 걷기에 아주 좋다.

 

 

 

 

 

 

 

 

 

 

 

 

 

 

 

 

 

 

 

 

 

호압사에서 점심공양을 받고..

8월25일(음력 7월15일)은 백중이다. 

 

 백중을 앞두고 이곳 호압사에서도 백중 입재를 시작으로 백중 기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백중은 많은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 백중(百衆), 

많은 음식을 공양해서 백종(百種), 안거가 끝나는 날이라 백종(百終)이라고 한다. 

 

불교의 5대 명절( 첫 번째가 부처님 오신날,두 번째가 성도재일이고 세번째가 출가재일

그리고 부처님 열반일. 백중)가운데 하나인 백중은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부모의 천도를 위해 효(孝) 사상을 실천하며 올바른 부모 공경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는 날이다. 

 

이와 함께 일체중생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중생구제를 실천하는 날이기도 하다.

 

 민간 세시풍속으로도 백중은 중요한 날이었다.

백중은 농촌에서는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기였다.

 백중이면 농민들은 그동안 잡초를 없애던 호미를 깨끗이 씻어 

농청에 보관하고 신명나는 축제를 열기도 했다.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으니 하루 푹 쉬었다가 추수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러니 농경사회에서도 이때는 축제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수있다.

 

 

 

  

 

비빔밥에 떡과, 배 한조각이 곁들어 있고 반찬은 미역과 오이냉채이다.

 

이런 음식을 장만하신 보살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몇 십년만에 먹어 본 사찰밥,

 이정도면 산사에서의 점심공양은 부족함이 없다.

 

 

 

 

딱히 공양의 대가라고는 할수 없지만

점심공양을 받고 호친구가 두사람분의 봉헌을 했다.

 

 

 

 

 

관악산둘레길로 접어든다.

 

 

 

 

 

 

 

 

 

 

 

성지에 다다르니 고요함이 흐른다.

 

기해박해(1839년)때 새남터에서 서양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교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에 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성지 소개문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더운날씨인데도 십자고상앞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신자들이 있다.

기도에 방해 될까봐 뒤에서 몇장을 남긴다.

 

 

 

 

 

 

 

 

 

성인 묘
1970년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이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
(앞쪽에 있는 작은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

  

 

 

 

야외제대

 

 

 

 

 

 

 

 

   

 

하산하는데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너무 더운 날씨..! 이쯤되니 삶의 고행을 느낀다.

 

 

 

 

 

 

호친구가 새벽에 밭에 가서 수확해온 농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