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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서평화나눔

"우포도청(右捕盜廳) 터"를 지나며../19년7월19일(금)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 (서린동 154-1) 광화문 우체국과 동아일보사 자리]

 

종로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청계천을 걷다가

광화문으로 가는중에  언뜻 눈앞에 "우포도청터"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가 뭐해서 사진 한장을 담았다.

 

               [관련글을 옮겨보면..]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때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이후 350여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 되었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북산사건(北山事件)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좌포도청(좌포도대장 조규진)에서는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 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이다.

 

 을묘박해로부터 6년이 지난 1801년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현석문(가롤로)이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성 남경문(베드로)과 성 임치백(요셉)은 좌포도청에서,

성 한이형(라우렌시오)과 성녀 우술임(수산나) 등은

우포도청에서 각각 형벌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성 베르뇌(장경일 시메온) 주교,

성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물론 성 황석두(루카) 회장,

 성 장주기(요셉) 회장 등이 포도청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였다.

 

 또한 1868년에서 1871년 사이에는 이유일(안토니오), 한용호(베네딕토),

최사관(예로니모)등 수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1873년에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박해가 끝난 뒤에도 포도청의 순교사는 계속되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5월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최동진 빅토르)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신자들에 대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이곳에서 옥사했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는데,

병사(病死) 또는 물고(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고의가 아닌 죽음’이란 말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장살(杖殺)에 속함)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볼 때 좌·우포도청 자리는 박해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775년(영조 51년)에서 1890년(고종 27년)까지 포도청에서 처리한 사건을 정리한

 《포도청 등록》에는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이라 하여

체포하고 처형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즉 《우포도청 등록》과 《좌포도청 등록》에는 183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천주교에 연루되어 체포된 500여 명의 심문 기록이 실려 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 ․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 ․ 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순교했다고만 알려지고 있다.

 아래 순교자 자료도 좌 ․ 우포도청이 구분되지 않은 순교자들이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 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