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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

경희궁은 보수중이다..//22년11월16일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큰길로 나와 길 건너로 보이는 경희궁을 찾아 본다.

경희궁을 들어가기 전에 보이는 현판 글씨는 흥화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등박문의 사당 박문사의 정문으로 이용 하다가

광복후에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 되기도 했던 흥화문이 지금은 제 자리에 서있다.

 

 

 

흥화문 앞에 매표소가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갈림길 가운데에  "서울 중고등학교"표지석이 있다.

이곳에 표지석이 있게 된 배경은 일제가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세웠고,

해방후 1946년 서울 중고교가 자리했다가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했고

그 당시에 학교부지로 현 서울 역사 박물관을 포함해 궁궐 일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야외 공원에는 소나무와 붉은 낙엽이 가을을 만끽하게 한다.

 

 

 

 

 

 

 

 

 

 

 

 

 

 

 

숭정문 앞 계단은 많기도 하지만 가파르기도 하다.

 

 

 

 

인조반정(1623)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지냈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인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했다.

경종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함으로써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올렸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1810년(순조 10) 순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1829년(순조 29)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했고, 1834년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으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60년(철종 11) 철종이 일곱 달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옮김으로써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 궁궐이었다.

1889년(고종 26) 숭정문이 불탔으나 1902년(광무 6)에 재건했다.

정조 때 만들어진 〈경희궁지 慶熙宮志〉에 경희궁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궁성의 둘레는 총길이 1,100보로 6,600자였으며 사방에 5개의 문을 두었다.

동쪽에 정문인 흥화문과 왼쪽에 흥원문, 남문 개양문, 서문 숭의문(崇義門), 북문 무덕문(武德門)이다.

정전인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으로 궁성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뒤쪽에는 업무를 보던 자정전(資政殿)이 있었는데 이곳도 행각으로 둘러졌다.

숭정전의 동쪽에는 정침인 융복전이, 바로 서쪽에는 왕후의 침전인 회상전이 있었다.

회상전의 담은 5개의 문으로 둘러졌었고, 주위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또 융복전 동쪽에는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가 생활하던 곳인 장락전(長樂殿)이 있었다.

이들 침전 뒤쪽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는 후원이 자리했다.

1908년(융희 2)부터 일제에 의해 궁궐의 서쪽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기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되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25년 전매국관사로 궁궐의 동쪽이 분할되었고,

1926년부터 주요건물의 이전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다.

1928년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했고,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흥화문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함으로써

결국 빈터만 남게 되어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 학교를 서초동으로 옮기고 198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2002년 현재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숭정전과 여러 건물들이 보수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이 쳐져있다.

 

 

 

공사기간은 내년 1월 11일까지이다.

 

 

 

 

 

 

공사중인 건물 옆쪽으로 쪽문이 있어 밖으로 나오니 산책로와 연결된다.

 

 

 

돌계단을 올라본다.

보수공사가 한창인 궁궐 지붕이 보인다.

 

 

 

걷다가 앉아서 주변을 감상할수 있도록 의자도 놓여있다.

 

 

 

궁궐 뒷담장을 끼고 돌아본다.

 

 

 

 

 

 

바위위에 낙엽이 쌓여있는 곳에 안내문이 있다.

영렬천이다.

경희궁 위선당 뒤편에 위치하고 샘으로

바위틈에서 물이 나와 언제나 마르지 않고 매우 차가워 "초정"이라고 불렸다.

샘위의 바위에는 선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이 새겨져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은행잎들이 노랑잔디를 만들어 놓았고 그 중에  빨강 단풍나무 몇그루는

주변 색들과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돌담길을 따라 돌다보면 다시 숭정문 앞 광장이 나온다.

 

 

 

경희궁에서 내려오면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나갈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통해서 연결된 경희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전차 391호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했던 전차이다.

서울에서 전차 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이었으며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하였다.

이후 1968년 11월 전차 운행이 중단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