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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산이좋아/한강변돌아서

노량진 사육신공원을 찾아..

 

 

 

 


-동작충효길 1구간 -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155-1.

한강을 향해 내달리던 지맥이 물길에 놀랐는지  제방처럼 널찍하게 열어놓은 둔덕이 있다.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전에는 노량진 본동 시장을 중심으로

 자리한 주민들에게는 바람과 큰물을 막아주는 고마운 언덕이었다.


그곳에 오르면 한강을 흐르는 유람선이 그림처럼 보이고 강남북을 잇는 철교가

외갓집을 찾아가는 신작로처럼 자리매김하여 다정한 풍경을 연출해 낸다.

그 아늑한 곳에 자리한 묘지공원이 있다.

지근거리에 있어도 몇년을 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새로 단장한 도로옆 벽에 새겨져 있는 글귀도 생소하다.

더구나 요새 방영되는 "공주의 남자"드라마가 이곳 사육신묘와 연관이 있으니

글귀만 봐도 그시절의 살벌한 광경이 그려진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있는 관상수들..


 

  

 

 

 

 


공원입구에 세워진 홍살문이 있어

이곳이 사적지임을 느끼게 한다.


  

 

 

 


 

 

  

 

 

 

 

불이문..!

 이 문은 출입구가 세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육신 신령께서 통용하는 문이고

일반 참배객은 양쪽문을 이용해야 한다.  



  

 

  

 

 

 

 

-이곳에 묘지가 조성하게된 그당시의 상황대략-

  신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직접 단종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며 왕권까지 장악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최고조의 포악성을 들어낸다.

단종의 친인척(관직에 올라있는 친척과 영향력이 있는 친척)들을 처형한다.

어린 단종(임금)은 급기야 수양대군에 자신과 중전 만큼은 죽이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드디어 수양대군은 왕으로 등극하는데

바로 조선의 7대임금 세조다.

그러나 민심은 여전히 어린 임금과 중전에게 있고 충신들의 절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상왕(단종) 복위" 사건(1456)으로 여섯 신하가 죽음을 맞는다.
 

정창손의 밀고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김문기, 유성원, 이개 등이

 목숨으로 충의를 지켰다 하여 "사육신" 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나라에는 충신이요 수양대군(세조)에겐 역적이니 사육신뿐 아니라

 집안의 사내들은 다 처형되고 아녀자들은 관비(노비)가 되는 등

 삼족이 멸하게 된다. 뿐만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가담한 자들은 모두 처형,

신하들의 씨를 말렸을 정도 였으며 목숨은 부지했으나 충심으로 벼슬을 버린

 여섯 신하를 "생육신" 이라 하는데, 김시습, 이맹전, 원효, 조여, 성담수, 남효은이 그들이다.

이렇듯 어린단종의 훌륭한 뜻이 있었음에도 이로인해 노산군으로

강등(1457)되어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단종은 아예 서인으로 강등되고 결국 한 달 뒤 수양대군(세조)이

보낸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뜨고 만다.

 단종이 유배를 처음 시작했던 청령포는 강물이 휘감아도는

 하회지역으로 지금도 육지의 섬 이라고 불리워지며

 소나무숲 한쪽에 "금표비" 라는 비석이 있다.

 



<금표비>

금표비에는 단종께서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계시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에 세운 비석으로 동.서 삼백척, 남.북 사백구십척 이라 새겨져 있다.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782년(정조 6년)에 세워진 "신도비"

 

  

 

 

 

 


 

-오석 6각의 '사육신지묘비'-

 1955년 5월에 서울시가 오석을 육각형으로 다듬어 세웠다.

6면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하위지,

유성원의 성명과 시조, 혹은 어록이 새겨져 있다.
 

 

  

 

 

 

 

 

  

 

 

 

 

 

 

 

 

 

 

 

의절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다. 

 

 

 

 

 

 

 

 

내부는 사육신 위패만 모셔져 있다.

 

 

 

 

 

 

  

 

 

 

 

 

 

 

 

 

 

 

 사당 뒷편으로 나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사육신이 모셔져 있는 묘지가 나온다.

이들은 당시 사지를 씻기는 처형을 당하여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당시22세.1435~1493)이 이분들의 육신을 주워 지게에

지고 한강을 넘어  이곳에 안치, 묘를 만들었다 한다.

 

 

 

 

 

 

 

 

 

-성삼문 선생-

 자는 근보. 눌웅,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 본관은 창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47년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집현전 학자로서 글씨를 잘썼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세종으로부터

 총애받았고  한글집현시에 공로가 컸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공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였으며 1456년 좌부승지를 단종 복위 모의를 주도했다.

거사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모두 체포되고 세조가 친국할때(왕이 직접 신문하는 일)

"너는 무엇때문에 나를 배반하였느냐고?" 하니

 "옛임금님을 복위시키려고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쓰여있다.

세조가 무사들로 하여금 불에 싯뻘겋게 단 쇠로 다리를 찔러 꿰뚤었고 팔을 잘라 버렸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어릴적 외우고 다니던 싯귀가 떠오르니...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박팽년 선생(허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현 시호는 충정이고 본관은 순천이다.

대제학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박중림선생의 아들로 충청남도 아산도교(신창)에서 출생하였다.

 

1434년에 문과에 급제 1447년에 중시에 급제하고 집현전

학자가 되어 여러가지 편찬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집현전 학자들중 모범이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집의를 역임하였고, 집현전재학, 충청감사, 예문제학,

형조참찬 등을 역임했다. 아버지. 형 등 일곱분이 한꺼번에 처형되었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개 선생-

자는 청보. 백고 호는 백옥현 시호는 충간 본관은 한산 목은 이색의 증손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잘 썼고 목은으로부터 이어받은 풍모가 있었으며

1436년에 문과에 급제 1447년에 중시에 급제 하였다.

호당에 들었고, 집의를 거쳐 집현전부제학에 이르렀으며 시문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 단종 복위 모의계획을 가장먼저 주장하였고

 이에 뜻을 같이 한 유생중심의 거사가 치밀하게 추천되었으나,

동지인 김질의 밀고로 탄로나고 선생이 잡혀오자 세조가 오랜친구

라면서 사건 진상을 밝히라고 강요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동안 안색 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참혹한 처형을 당했으며 아들 공희도 처형되었다.

 

 

 

 

 


-유응부 장군-

 자는 시니, 선장 호는 벽량 시호는 충목 본관은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무과에 급제한후 첨지중추원사. 경원부사.

평안도절제사를 지내고 1455년(세조 1년) 동지중추원사를 역임했다.

같은해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복위를 모의하고 성승(성삼문의 부) 박쟁 등과 같이

별운검의 직분으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에서 위 성승 장군및

박쟁장군과 더불어 새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다.

 배신자의 밀고로 탄로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끝내는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처형을 당하였다.

아들 사수도 처형되었다. 학문도 잘하였고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했다.

 청렴결백하여 관직에 있을 때도 가정이 어려움을

 면치못했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졌다.


 

 

 

 

 


- 유성원 선생(허묘)-

자는 태초 호는 랑간 시호는 충경, 본관은 문화.

 한성부윤 유호의 손자이고 사인 사근의 아들이다.

 1444년 문과급제, 1447년에 중시에 급제하고 호당에 들고

 다시 집현전 학자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집현전 지제교.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성.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다.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하고 이개 선생과 은밀히 자주 만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대신의 자제가 언관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1456년 단종복위 모의가 탄로나자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앞에서 의관을 갖춘채 자살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관리가 와서 시신을 옮겨가서

다시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처형을 당했다.  

 

 

 

 







 

-하위지선생(허묘)-


본관 진주(). 자는 천장. 호는 단계() 시호 충렬().

1435년(세종 17) 생원을 거쳐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 사가독서()를 하고,

1444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상정()에 참여하였다가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의 탐람죄()에 인책 사임하고,

 1451년(문종 1) 집현전 직전(殿)에 등용되어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앞서 신정()한

"진설()"의 교정과 "역대병요"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4년(단종 2) 부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예조참판에 올랐다.

침착·과묵한 청백리로,

 측근에서 세조를 보필하는 동안 국록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따로 저장해 두었다.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 체포되어

 친국 끝에 동료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졌다.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과천의 민절서원,홍주()의 노운()서원, 연산()의 충곡서원,

의성의 충렬사등에 제향되었다. 


 



 


김문기 선생(허묘)-

자는 여공, 호는 백촌, 시호는 충의이고 본관은 김녕이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고

활달하였으며 언변에 능하였다. 1426년에 문과 급제한후 한림학사.

사간원헌납. 함길도도진무. 병조참의 승지. 함길도관찰사.

 형조참판. 함길도절제사.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를 역임하였다.

단종복위 모의 주역으로서, 모의당시 직책이 공조판서 겸 3군 도진무였으므로

군동원의 책임을 맡은 내용이 실록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 불복하여,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아들 현석도 처형되었다. 

 

 

 

역사관은 유물 정리를 위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도 사육신에 대한 후손들의 자기조상 지키기 논란때문에..?

 

 

  

 

 

 

 

 

 

공원전망대에서니 전에있던 아파트를 헐어내고

 시민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켰네..

 한강과 철길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63빌딩이 보인다.

윗쪽에 마련된 탁자에서 한강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

 스카이 라운지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1호선 전철과 열차들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금부도사 왕방현은 단종을 영월까지 압송한 뒤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애닯은 마음을 시조로 남기기도 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