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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산이좋아/전국명산돌아

수리산 무성봉을 지나 슬기봉으로../20년9월13일(일)

 

 

 

 

2.5단계로 운영하는코로나19의 정부정책과 삼성산일대에서 산악회카페회원들의 집단 감염발생 뉴스를

접하고 등산인들이 덜 모일것 같은 장소로 수리산 태을봉, 슬기봉을 오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9호선 동작역에서 4호선 지하철로 갈아탔는데 승객이 별로 없어 자연스럽게 띄어 앉기가 이루어졌다.

 

수리산역에서의 등산 모임은 2010년2월25일, 2014년12월6일에 이어 세번째이다.

 

 

 

 

전에는 겨울산행때 왔으니 수리산역사를 그대로 지나쳐서 오늘에야 사진으로 전경을 담아본다. 

 

 

 

 

출구라야 1번 2번출구가 전부이고 밖에 나와도 넓지 않은 광장이니 만나기는 수월하다.

 

 

 

 

지남번에는 아파트를 가로질러 곧바로 가파른 산길로 올랐는데 오늘은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로 했다.

 

 

 

 

들어본적이 없는 능내정 안내가 나오니 생소하기는 하다.

호친구와 만나 10시30분에 아파트사잇길로 들어섰다.

 

 

 

 

나무데크계단이 나오면서 약간 오르막길이 나온다.

주변으로 잡초가 많아서 주 등산로인지 약간의 의문을 하기에 충분했다.

 

 

 

 

어느곳이든 부지런한 이들이 있어 텃밭을 일구곤하는데 이곳은 고구마가 주 품목이다.

 

 

 

 

이곳은 갈참나무가 분포되어있어 걷기에 좋은길인것 같다.

주변에 사는 분들은 트레킹코스로 안성맞춤이겠다. 

 

 

 

 

가다가 지치면 의자에 앉아 쉴수있는 장소도 있으니..

 

 

 

 

수리산주변에 있는 등산로중 이렇게 넓은 길도 있는데 왜들 좁은길로만 다니는지..?

 

 

 

 

무성봉까지 1.59km 남았다는 안내.. 

 

 

 

 

 

 

 

 

 

 

 

 

 

 

 

 

무성봉 이정표가 또 나온다.

 

 

 

 

무성본 가는길에 능내정이라는 정자가 보이고 주변에 앉아 쉬는 분들이 많다.

이곳에서 나이꽤나 들어 보이는분을 만났다.

그분왈"수리산역에서 왜 아파트뒷길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이길이 정상 루트"라고 엄청 아는체를 한다.

그바람에 잘되었구나하고 앞으로 전진한게 고행길이 되었다는것이다.

 

 

 

 

 

 

 

 

 

 

 

 

 

 

 

 

무성봉에 오르니..258m고지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는 분들이 많은걸 보니 종착지로 삼고

하산하는 루트가 아닌지 모르겠다.

 

 

 

 

 

 

 

 

슬기봉으로 오르기 위해 발길을 옮긴다.

 

 

 

 

슬기봉까지 1.7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군부대가 너무 멀고 높게 보인다.

앵글을 돌려 목표물을 일부러 희미하게 촬영해본다. 이럴때 차라리 안보이는게 훨씬 좋다.

 

 

 

 

 

 

 

 

 

 

 

 

 

 

 

 

 

 

 

 

 

화장실공사를 할것인지 터를 닦아 놓았다.

 

 

 

 

이곳에서 수도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곧바로 오르는게 맞는것 같은데 산객 대부분이 우측길로 간다.

 

 

 

 

우리도 그 일행들 뒤따라 가다보니 하산하는 길 같아서 소로이지만 인적이 있는것 같은

직선 코스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오를수록 길이 없다. 단풍쌓인 길이라서 자칫 한눈팔면 아래로 나뒹구는 경우를 당할수도 있겠다.

 

 

 

 

바위를 넘고 나무를 잡고 아둥바둥거리며 오르니 땀이 비오듯한다.

인기척도 별로 없으니 괜한길로 왔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는건 어쩔수 없다.

 

 

 

 

오르다 쉬면서 다시 숨을 몰아 쉬길 몇번인지..

드디어 임도를 만났다. 이럴때는 직선 코스로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몸이 지쳤으니 바위를 봐도 느낌이 없다.

 

 

 

 

8부 능선에 올라 조망을 보니 광교산이 눈앞에 있다.

 

 

 

 

오래된 갈참나무는 상처를 남겨놓아 웅덩이가 남아 있는데 위를 보면 상수리가 열려있지 않다. 

 

 

 

 

 

 

 

 

 

 

 

 

가까이에서 다 담을수 없어 사진에서는 별것 아닌것 같지만

단일 바위로서의 크기는 수도권에서 흔히 볼수 없는 바위이다.

 

 

 

 

개구리형상의 바위..

 

 

 

 

드디어 슬기봉으로 오르는 임도를 만났다.

 

 

 

 

이제는 많이 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슬기봉 정상은 군부대로 등산이 불가하다.

 

 

 

 

 

 

 

 

 

 

 

 

 

 

 

 

 

 

 

 

점심은 늦은 오후 1시30분에 정자에서..

 

 

 

 

 

 

 

 

 

 

 

 

 

 

 

 

 

 

 

 

 

 

 

 

 

 

 

 

 

 

 

 

안양방면에서 진입하는 차량들은 저 앞에까지만 올라 올수 있다.

 

 

 

 

 

 

 

 

이 주차장부터 주차차량이 보이더니 안양시에서 들어오는 입구까지 공간이 별로 없었다.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잡은 수리산 천주교 성지가 나온다.

 

 

 

 

 

이곳의 지형은 병의 잘록한 목을 닮았다고 하여 "병목골"이라 불려왔으며

박해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고 담배노사를 지으면서

"담배골"이란 명칭으로도 불렸다고도 한다.

 

수리산 성지는 충남 청양 다락골이 고향이었던 최경환프란시스코 성인의아들인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유학을 떠난후 부인 이성례마리아등 가족와 함께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이룬곳이며 최경환성인의 고택 및 묘소가 자리하고 이는곳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길로 가는 기도처인데 시간이 없어 올라가지 못하는게 아쉬웠다.

 

 

 

 

 

 

 

 

 

 

 

 

 

 

 

 

최경환프란시스코성인 고택에 들른다.

 

 

 

 

고택성당으로 올라가는 왼쪽으로 주차장이 있고 입구에 성모자상이 있다.

 

 

 

 

 

 

 

 

최경환프란시스코성인은 수리산자락에 정착한후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포졸들에게 붙잡혀 옥사를 하였고 부인 이성례마리아와 7명의 자식등

식솔들 그리고 담배촌의 교우 40여명도 모두 붙잡혀 갔고,

이성례마리아는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후 세월이 지나 최경환프란시스코성인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다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되었다.

 

최경환성인 고택성당은 2008년 11월 2일에 완공하여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고 한다.

 

 

 

 

 

 

 

 

최경환 성인의 생애와 신앙생활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생애

 

 

 

 

최양업(崔良業)[1821~1861]신부생애에 대한 요약

최양업신부는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에 의해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공부하였고, 1844년(헌종 10) 김대건과 함께 부제(副祭)가 

되었다. 사제 서품을 먼저 받고 페리올 주교와 함께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이후 

최양업은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49년(헌종 15) 상하이에서 

마레스카(F. Maresca)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출국한지 13년 만인 1849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충청도 진천의 배티를 사목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전국에 걸쳐 있는 100여 개의 공소를 방문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1861년(철종 12) 영남 지방의 전교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말 베르뇌(S. F. Berneux) 주교의 집전으로 제천 배론으로 이장, 안장되었으며,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던 것과 비교하여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어졌다.

 

1996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제천 배론성지에 최양업신부기념성당, 

2002년 동상 제막, 2004년 최양업신부조각공원이 준공되었다

 

천주교를 탄압하던 시기 체포된 신자들이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겪었을때 당시 사용하던 고문도구들의 설명문

 

 

 

 

 

 

 

 

 

 

 

 

고택마당에는 성지조성 경과와 한국천주교의 역사등을 알수있는

간략한 설명이 곁들인 표지판이 있어 도움을 주었다.

 

 

 

 

 

 

 

 

 

 

 

 

 

 

 

 

성당앞에 모셔진 두분의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