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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배론,용소막성당/원주교구/14년10월9일

  

 

 

 

 

흑석동성당 15구역 성지순례 가는 날..

오전 8시에 차는 정확하게 출발한다.

성지가는 길에 박달령휴게소에서 잠시 머무는 여유도..

  

 

 

 

 

 

 

 

 

 

 

  

 

            

          [원주교구]

        

 

박해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을 간직한 순교자들 요람지
배론(舟論) 성지에 도착하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44-1>

배론은 박해 시대 교우촌이며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한 순교자들의 요람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알렉시오가 <백서>를 작성한 곳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무덤이 있고,

1855년 한국 최초의 격식을 갖춘 신학교인 성 요셉신학교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배론[舟論]이란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한 것에서

 부쳐진 이름으로,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이며,

1890년대 이래 현재의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변에는 날마다 성지순례자들을 상대로

 자기가 수확한 농산물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할머니들..!

하나의 더불어 사는 사슬이 되어 있었다.

 

 

 

  

부천성모병원직원들과..

 

 

 

 

 

 

 


 

 

 

 

 

이곳은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이

이곳의 옹기 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을 적은 이른바<백서(帛書)>를 작성했던 곳이다.

 

 이 백서를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1751~1808, 알렉산델) 주교에게 보내려다

체포되어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에 관련된 신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되었다.

 

 

 

 

 

그 후 배론에 교우촌이 다시 형성된 것은 1840년대였다.

1855년 초에는 배론 공소 회장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집에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 사후에 한국 천주교회의 장상 역할을 하던

 매스트르 신부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교장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장주기는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신학교가 바로 현 가톨릭대학교가 그들의 전신으로 지목한,

격식을 갖춘 최초의 신학교였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약 5개월 간 배티에 가매장했다가 11월 초 이곳 배론으로 그 시신이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안장되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박해의 여파로 장주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두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3월 11일(음 1월 25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장주기는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장주기는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됨으로써 배론은 순교자들의 요람지가 되었다.

 

 

 

 

 

원주 용소막성당에..

 

 

 

 

 

 

 

 

 

 

 

 

 

 

원주 용소막성당(原州龍召幕聖堂)..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이성당은 풍수원 성당과 원주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번째로 건립된 성당으로,

 풍수원성당의 전교회장으로 있던 최석완이 1898년(고종35)

 원주 본당 소속 공소(公所)로 모임을 시작했다가,

1904년 (고종41)프와요(Poyaud)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독립성당으로 되었다.

 

 발족당시 원주군 일부와 평창, 영월, 제천, 단양등 5개 군에 17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초가였다가 시잘레(Chzallet)신부에 의해 현재의 벽돌건물로 지어졌다.

이 성당은 고딕양식을 변형시킨, 당시 우리나라 소규모 벽돌성당의 소박한 모습을 보여 준다.

전면중앙에 돌출한 3층 종탑을 두고, 3랑식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제단이 있는 후면은 8각형의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서쪽의 한 면에는 제의실이 붙어있다.

내부기둥은 비교적 가는 팔각형 목조 기둥으로 되어있다.

 상부 천장은 목조로 된 반원형 아치로 되어있고,

통로 부분은 평탄하게 처리했다. 내부바닥은 신발을 벗어야 하는 마루로 되어있다.

 

창의형태는 반원형 아치로, 테두리는 회색 벽돌로 장식되었다.

시잘레 신부는 신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써서 이 건물을 지었으며,

1915년 가을에 완공하였다. 후에 일본군에 의해 종(鐘)이 공출되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이 창고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한창 공사중인 성당 전경

 

 

 

 

 

 

 

 

  

용소막성당 내 두루의집

 

 

 

 

 

 

 

 

 

 

 

 

기도:성체조배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