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2017년 직장사목국 국내성지순례../17년9월2일(토)

 

 

 

동성당 성모동산에 8시 30분에 모이라는 공지에 따라..

명단을 확인하고 9시에 배론성지로출발하는 3호차에 탑승했다. 

<출발에 앞서명동성당 성모동산에서..>

 

 

 

 

 

 

   

 

  

2017년 직장사목부 국내성지순례

1. 일 시 : 9월 2일(토) 8:30 ~ 19:30

2. 주 제 : 순교자의 숨결을 따라서..

  (베론성지 - 용소막성당 - 풍수원성당)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서울시내구간은 약간 밀리는듯 하더니  그런대로  흐름을 타고 

문막 Ic를 빠져나가 원주를 거쳐 11시에 배론성지에 도착한다.  

 

  

 

 

 하루를 무사하게  함께해준 3대의 버스

 

 

 

 

 

 

 

 

 

배론성지에 도착하다.

"배론"이라 하여 어떤 외방선교회와 관련이 있나..? 싶었는데

그러나 생각과는 엉뚱하게도

"배론"은 순수 우리나라 말로 이곳의 지형자체가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구학2리-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교도 황사영(黃嗣永 : 1775~1801)이 머무르면서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이 있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사제가 되신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성지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계곡 물줄기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눌수 있는데

왼쪽은 최양업신부를 기리는 대성당과 소성당, 성모자상과

야외미사를 위한 제단이 있는 넓은 풀밭과 그를 바깥쪽으로 감싸고 도는

로자리오 동산까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엔 성모상, 그리고 신학당과 토굴, 옹기가마가 복원되어 있었으며

 황사영순교자현양탑과 순교자의 집등 경내 부수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뒷산쪽으로는 "십자가의 길"과 "최양업신부 묘소"가 있다.

  

 

 

 

 

 

 

 

 

 

 

 

 

 

 

 

  

  

 

 

 

 

 

 

 

 

 

 

 

 

 

 

이곳부터 십자가의길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길

제1처:예수 사형 선고받으시다.

 

 

  

 

제2처:예수 십자가를 지시다.

 

   

 

 

제3처:예수 첫 번째 넘어지시다.

 

 

 

 

십자가의길 제 1처를 지나 조금 오르니  

양지바른장소에 성직자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지학순주교님묘소도 이곳에 있고.. 

 

 

 

 

이곳은 성직자사후에 모시게 될 장소를 미리 조성해 놓은 곳..

 

 

 

 

 

 

 

 

 

 

 

 

제4처:예수 어머니를 만나시다.

 

 

 

 

제5처: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지다.

 

  

 

 

제7처:예수 두 번째 넘어지시다.

 

  

 

  

제8처:예수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시다.

 

 

 

 

제9처:예수 세 번째 넘어지시다.

 

  

 

 

제10처:예수 옷을 벗기우시다.

 

 

 

 

제11처: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다.

 

 

 

 

제12처:예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

 

  

 

 

제13처:제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다.

 

 

 

 

제 14처 : 예수 무덤에 묻히시다.

 

  

 

 

최양업신부님 묘소에 예를 표하다.

 

 

  

 

 

  

 

 

 

 

 

 

오르내리는 목재로 만든 계단간격이 너무 넓어

오르내리는데 질못하면 다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여야

사고없는  순례길이 될것같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이 이곳 성지다.

"성 요셉 신학교"바로 여기에 세워졌다.

메스트로 신부가 1855년 요셉 장주기의 집에 신학교를 세우고,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등 프랑스 신부들의 지도 아래 10여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신학교였던 "성 요셉, 배론 신학교"도 1866년 병인박해 때에

두 신부님과 장주기 요셉의 순교와 함께 문을 닫게 되었다.

 

 

  

 

 

  

 

 

 

 

 

 

   

 초가집 신학교 건물은 2003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서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새로 세워진 것이다.

초가 형태로 복원된 성 요셉 신학교를 2명의 신부 동상이 늘 지켜보고 있다.

신학을 지도 하였던 두분 신부님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로서는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곳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의 백서가 쓰인 토굴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황사영은 영조 51년인 1775년에 태어나 순조 원년인 1801년에 순교하였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이곳 배론으로 피신,

토굴속에서 조선 천주교의 박해와 비극을 중국의 북경 주교에게 호소하는 긴 편지를 쓴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다.

 

이 편지는 결국 발각되어 황사영은 이로 인하여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이 "황사영 백서"는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배론의 토굴은 황사영이 내려왔을 당시에는 옹기 저장고로 위장됐는데,

황사영은 8개월 동안 이 토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는 토굴은 1987년 이원순 교수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

 

  

 

 

 

순교자들의 집

1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단체 피정의 집이라고 한다.

 

 

 

 

 

 

 

 

 

 

 

   

 

배론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묘와 그를 기리는 조각공원

 기념성당 등이 있다는 점도 유명함을 더 한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인으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사제가 된 분이다.

 신부님은 마카오에서 유학한 후 1849년 상하이에서 서품을 받았다.

몸을 돌보지 얺고 전교활동에만 몰두한 나머지
1861년 식중독과 과로로 인한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났다.

 

배론성지 산기슭에 묻혀서 성지 순례자들과 소통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최양업 신부의 짧지만 위대했던 일생을 벽화로 새겨 놓았다.

방문객들을 숙연하게 하고,

감동을 주는 벽화 30여장을 새겨 본다.

 

그를 기리는 조각공원을 한걸음 한걸음 옮기변서 기도하고 명상을 하다 보면

"미로의 기도" 장소에 다다른다.

 

"인생 여정에는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조각공원이라고 해서 조각 작품이 있는 건 아니구

앞쪽으로 제대가 있고 양 옆으로는  최양업 신부님의 삶 조각으로 새겨 놓았다.

내부는 납골 봉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배론성지에는 새로 지은 현대식 성당이 늠름하게 들어 서 있다.

대성당과 소성당으로 나뉘어져 있으나 실은 한 건물에 공간만 분리해 놓은 것 같다.

현대식 건축물이라서 그런지 세련된 느낌이고 예술적 감각이 물씬 풍겨져 나온다.

 

 

 

  

  

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고..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삼천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고..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고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최양업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 

 

 

 

  

성지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이곳에서 직접수확했다는 나물등을 갖고 나온 주머니가

판을 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이 서너가지를 주문하고 대금을 주니

잔돈을 내주는데 헷갈리신다.

그런걸 보니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게 확실한것같은..

 

그런걸 생각하면서 인생 여정을 압축한 기도문을

되새기면서 '배론성지'를 떠난다.

 

  
 

 

 

 

 

용소막성당으로..  

 

 

 

 

 

-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 -

 

 용소막성당에 도착하여 순례자식당앞에 줄지어 순서대로

식판을 들고 들어가니 우리들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답해주시는 

이곳 성당 교우분들의 모습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시골스런 뭉특함이 배어있는 식당에서 서로 익숙치 않은 얼굴들이지만

 나란히 앉아 함께하는 밥이니 더더욱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약 1시간에 걸친 각자의 휴식시간을 갖는다.

 

 

 

 

 

 용소막 본당은 1904년에 강원도에서는 세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이 후 초대 주임 프와요(Poyaud, 表光東) 신부가 매입하여

개조한 초가집을 성당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4년에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 때에 현재의 새 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본당에 부임하자마자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그 결과 1년 여 만인 1915년 가을에는 건평 100평의 벽돌조 양옥 성당을 완공하고,

프랑스 "루르드(Lourdes)의 성모"를 주보(主保)로 하여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당은 정면 중앙부에 높은 첨탑을 갖춘 고딕식 건물로,

 성당의 평면은 삼랑식(三廊式)이다.

내부 공간은 목조의 열주에 의해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이 구분되고,

정면에 제대부가 있는 서양식 성당 건축의 일반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였고,

성서 번역에 힘썼던 선종완 신부의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소막 마을은 지형·지세가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데

용소막성당 자리가 용의 발 부분에 해당하며 그 뒷산이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어

용소막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지금은 모든게 평안해 보이지만 한때는 일본군에 의해 종(鐘)이 공출되었고

한국전쟁때는 인민군이 창고로 사용하는등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성당 건물의 주위로는 느티나무가 열을 지어 있고

왼쪽으로 언덕 아래엔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시골 성당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성당 구역의 엄숙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성당주변으로 수령 150여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다섯그루가 늘어서 있다.

 

  

 

 

 

  

 

 

 

 

 

 

 

 

 

 

 

에어콘 시설이 없는 본당은 다소 습하기는 해도

날씨가 선선해져서인지 시원한 느낌인데..

한여름 40도를 기록할때는 혹서기엔 어떨런지..? 

 

 

 

 

벽에 걸린 "십자가의길" 글귀가 옛날 표현대로 되어있다. 

 

 

 

 

 

 임신부님의 즉석 친필 삽화 

  

 

 

 

 

성서학자였던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기념관에 들렸다. 

 유물관 안에는 한글과 영어는 물론 라틴어 성경에 독일과 이탈리아,

 러시아등 여러 나라의 성경들이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선종완 신부가 공동번역을 할때 쓰던

책상 일조와 수십 권으로 묶은 성경 번역의 초고등 생전에 쓰던 유물과 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신부님의 친필자료들과 연구를 잘 하기위해 손수 만드셨다는 육각형책상에서도

그분의 성서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맨발의 투혼이신 황신부님 그리고 임신부님과..!

  

 

 

 

 

 

 

 

수녀님의 열띤 교육과 설명으로 조금은 정신무장이 된채 

 선조들은 어떻게 성경에 대한  이해와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였을까..?하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우리들의 발길은 세번째 순례지인 풍수원 성당으로 향한다. 

 

풍수원성당으로 가는길..

 

 

 

 

 

 

 

 

 

 

 

 

 

 

 

 

 

 

 

 

 

 

 

 

 

 

 

 

 

 

 

 

 

 

 

 

 

 

 

 

 

< 200년전에 터를 잡고 100돌을 맞이하다 > 

-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 

 

 서울 약현성당(1892년), 전북 고산성당(1896년), 서울 명동성당(1898년)에

이어 한국에서 네번째로 지어진 성당이기도 하다.

 

  

 

 

 풍수원은 최초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로 1801년,

신유사옥 때 40여명의 신자들이 숨어 지낼 곳을 찾다가 정착한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사제도 성당 건물도 없이 신앙을 지키며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1866년 병인년에 대박해가 있자 더 많은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다가 이곳으로 모여 들었는데

 그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토기점을 하며 생계를 이었고,

1888년 마침내 프랑스 성직자 르메르이 신부를 맞이하면서 정식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오후 4시 30분에 신발을 벗고 마룻바닥에 맨발로 들어가서

 미사를 드리는 우리는 뭔지 모를 추억어린 감회를 느낄수 있었다.

 

더우기 신학생때 이곳에 왔다가 신부되어 미사를 집전하는게 꿈이었는데

  오늘 이루어졌다는 황신부님의 강론말씀은 모두의 박수로 대신했다.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모두 기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