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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부여 충화에 있는 "지석리 성지"를 찾아서../22년1월6일

 

 

 

[승용차] 충남 부여읍에서 서천 방면 4번 국도로 진행하다

홍산면 소재지에서 좌측의 613번 지방도를 따라 3-4km쯤 가면 일흥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가 된다.

여기서 충화 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2.8km 지점 좌측에 지석묘, 팔충사 직전에 있다. 

 

부여 지석리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임천 괴인돌 출생 손선지 베드로와 임천 출생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두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시성비가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 때 혹독한 고문 속에 순교한 이들을 위해 비신자인 손선지 종씨들이 기증한 밭에 시성비를 세웠다.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이었다.

손선지(1820~1866, 베드로)의 고향이며, 정문호(1801~1866, 바르톨로메오)도 임천 출생이었다.

당시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다가 정문호는 동향인인 손선지가 이주하여 살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함께 정착하여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담배 상인으로 가장한 포졸들에게 잡혀

성인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천호 성지에 묻혀 있다.

이들 두 성인은 팔이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형장에서도 오히려 축복의 순간을 맞는 기쁨에 용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선지 베드로는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심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12월 13일 숲정이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될 때까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예수 마리아’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바 있는데,

손선지의 영향으로 입교하였고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년)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 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 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
‘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충남 부여군충화면 지석리 3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