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색이있는오솔길/이런저런모임

"광통교"를 걷다. 3년만에 "어쩌다 모임"을 하고../22년8월25일


 

 

 

3년만에..

8월25일 저녁 5시까지 종로3가 "한일옥"으로 모이라는 메세지가 떳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오후4시까지 내린다가 5시부터 소강상태다.

파란불이 들어오자  손에 우산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민들의

표정들이 담담하기만 하다. 

 

 

 

리모델링으로 새롭게 단장한 "한일옥"에서 불고기로 저녁을 했다.

 

 

 

수표교에서 청계천으로 내려가다.

 

 

 

수표교 주변 안내도이다.

세운교에서부터 관수교, 현재 우리가 있는 수표교, 삼일교, 장통교, 

광교, 광통교까지의 다리를 안내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1년 중 유일하게 밤에 돌아다닐 수 있었던 날은 정월대보름이었는데,

정월대보름 전날인 14일은 양반들이, 정월대보름날엔 평민들이,

그리고 대보름 다음 날에는 아녀자들이 다리밟기를 하러 광통교에 모였다고 한다.

다리밟기는 다리를 밟으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에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도성 내 모든 다리를 밟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한다.

 

 

 

 

 

광교밑에서..

이곳 광교도 원래는 돌로 만들었는데 복원과정에서 철재로 구축되어 있다.

 

 

 

 

 

 

 

광통교에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행정구역은 5부 52방 이었다.

광통교는 52방 중 하나인 광통방 옆에 있었다.

현재 청계천다리 중에서는 유일하게 원형 일부를 살린 다리다.

본래는 광교자리에 있던 것을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광통교를 세우라 명한 왕은 태종 이방원이고,

무덤돌의 주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을 제치고, 신덕왕후의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에 오르게 되자,

신덕왕후 강씨를 증오하게 된다.

그러다 흙으로 만들어졌던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는 일이 생기자,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자리의 병풍석과 난간석을 뜯어내어 광통교를 만드는데 쓰게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무덤돌을 뒤집어서 사용하게 했다.

 

 

 

 

 

석축은 정릉을 장식했던 병풍석으로써 구름무늬가 조각된 예술품이다.

그 중에는 병풍석이 거꾸로 뒤집힌 것도 있다.

 

 

 

 

교각은 물이 흐르는 방향을 향해 마름모꼴로 놓여 있다.

이렇게 하면 물의 저항을 줄이고, 홍수 때 물이 빠르게 흘러간다.

교각에는 청계천 바닥을 파내는 준천공사를 한 년도가 새겨져 있다.

예를 들면 경진지평(庚辰地平)은 조선 21대 왕 영조가 1760년에 공사를 하고 새긴 글자이다.

이 글자를 새긴 곳까지 모래가 차면 준설작업을 다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