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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저산산이좋아/한양도성길을

궁궐의 뒷동산, 창덕궁"후원(後苑)"을 관람하고..//23년8월25일

 

 

창경궁출사를 마감하고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함양문으로 들어왔다. 체감온도는 33도를 웃돌고있다.

오늘같이 아침에 비가 내린 날이면 "비원"이라고 불렸던 창덕궁 후원 관람객도 많지 않을것이니

덥고 힘들어도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따라 입장권 현장 구매를 문의하였더니 오후 1시에 투어할수 있다고 한다.

흔쾌히 입장권을 구매하고 30여분을 기다렸다.

 

내가 앉아있는 위치는 창덕궁 성정각과 낙선재 영역인 칠분서 사이, 방금 지나 온 창경궁으로

통하는 함양문 앞 의자이다. 의자에는 아직도 띄어앉으라는 안내스티카가 붙어있다.

 

어릴적 비원에 와서 호랑이등 동물들을 본 기억이 새롭다.

봄에 오면 사꾸라꽃(벗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던 순간들만 기억이 나고 있으니

오랜 세월이지나 많은것을 잊고 희미한 기억속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헛 웃음이 나온다. 

 

 

 

입장 5분전에 해설사의 안내멘트가 들려온다.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는..

어디에서 대기했었는지 40여명이 모여들었다. 외국인들도 섞여있다. 

 

 

 

통제선을 벗어나 후원길로 들어선다. 비원(祕苑)이라고 불렸던 창덕궁의 후원은

사적 122호인 창덕궁의 공식명이 "창덕궁(비원포함)"이었다가 2011년 7월에야

뒤를 떼어내고"창덕궁"으로 변경되었다고 하니,

오늘 탐방하는 영역은 별도 명칭이 없는 "창덕궁 후원"이라고 통칭하니 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구한말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祕院)"을 두었다고 하나

현재 불리는대로 "후원"으로 기억하는게 편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다만, 아쉬운건 "옥류천 일원" 관람이  중단되고 있는데  9월부터 개방한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시기는 확실히 모르겠음도 덧붙인다.

 

 

 

나뭇잎으로 그늘진 길을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부용지일원"이 나타난다.

보이는 건물은 "영화정"이다.

 

 

 

더운 날씨에 그늘진곳이 아닌 땡볕 아래서 해설한다는건 고행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도 자세하게 알려주는 모습에 감동되었는지 관람객들 모두 잘 따라준다.

 

 

 

 

 

후원의 첫번째 정원인 "부용지"

연못 크기는 300평으로 주위에 주합루, 서향각, 영화당, 부용정등이

우거진 나무와 연들까지 합을 이루고 있다.

 

 

 

북쪽 높은 언덕에 자리한 "주합루"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짜리 팔짝지붕 집이다.

1층은 어제각, 2층은 주합루라 불렀으며, 역대 왕들의 글과 어필, 서적을

보관하던 왕실 도서관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이름이 갈렸다.

주합루 주위로 담장과 같은 취병을 길게 둘러 바깥과 경계를 그었으며

그밑에 팔작지붕 문인 어수문을 두었고 서쪽에 주합루를 보조하는 

서향각과 희우정을 두었다.

 

 

 

서향각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주합루에 보관된 서적과 어진, 어필을 말리던 포쇄소이다.

포쇄란 서적과 어필이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 망가지는것을 막고자 햇볕에 말리는 것을 뜻한다.

1911년 한때는 왜정에 의해 양잠소로 변질되어 한동안 누에를 치는곳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서향각 뒷쪽에 자리한 희우정은 2칸짜리 팔짝지붕 집으로 왕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1645년 초당으로 지어졌으며, 원래 는 취향정이었으나 1690년 가뭄이 심하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자 이를 크게 기리는 뜻에서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비에 기뻐했다는 뜻의 "희우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

어수문이란 이름은 정조가 붙인 이름으로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다"는

격언처럼 통치자는 늘 백성을 생각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앞에는 3개의 계단이 있는데, 중앙계단은 왕의 전용이고, 계단만 덩그러니 있는

좌우 계단은 신하와 아랫사람들의 계단이다.

 

 

 

문 좌우로 "취병"이라 불리는 대나무로 엮은 담장이 있는데 오래전에 사라진것을 복원했다.

모르면 그냥 지나치지만, 알고 나면 자세히 보면서 사진에 담을수도 있다.

 

 

 

부용지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의 식수를 제공하던 우물이다.

세조때 발견된 우물의 하나로 169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는데

지금은 우물입구가 봉해진채 묻혀있다.

 

 

 

부용지 서쪽이 있는 "사정기비각"

1칸짜리 팔작지붕 건물이 작은 문을 거느리며 부용지를 굽어보고 있다.

1460년 세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조카인 오산군(임영대군의 아들)과

 영순군(광평대군의 아들)을 시켜 부용지 일대에서 샘물을 찾게 했다.

그래서 4개의 샘을 발견했는데, "옥정" "마니" "유리" "파려"란 이름으로 명명했다.

이후 2개의 우물이 사라졌고, 남은 2개도 크게 망가졌는데, 1690년 숙종은 이들 우물을

보수하고 그 내력을 새긴 4개의 비석을 세워 "사정기비"라 하였고 비석을 보호하고자

비각을 씌웠다.

비각 옆으로 용머리 조각이 있어 북악산의 물을 쏟아내고 있다. 

용머리 양쪽으로 네모난 돌이 있는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양이 새겨져 있다.

 

 

 

활짝 핀 연꽃 모양과 같은 "부용정"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자형 건물인 부용정이다.

1795년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왕족들과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으며, 신하들과 종종 뱃놀이, 시짓기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춘당대시가 치루어졌던 "춘당대"

부용지 동쪽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건물인 영화당이 있다.

1692년에 재건된 건물로 특이하게 툇마루가 있다.

정조이전까지는 왕족,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던 장소였으나, 

이후로는 문과와 무과등 과거시험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다. 

 

영화당 동쪽으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춘당대라 불렀다.

춘당대는 원래 창경궁 춘당지 앞까지 이르러 지금보다 더 넓었으나 

지금은 돌담이 둘러져 창경궁 구역은 별도의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과거가 열릴때는 왕이 친히 나와 살폈다고 하며, 

여기서 치루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라 불렀다.

 

 

유일하게 있는 화장실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햇빛은 머리위에서 따라 온다. 

 

 

 

금마문 옆에 불로문이라는 석문이 서있다.

통돌을 깍아만든 "불로문(不老門)"이 애련지를 조망하는 출입문 역할을 하고있다.

이곳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청와대 상춘대로 이동하는 곳에서도 동일한 모형을 볼수 있다. 

 

 

 

불노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의두합"이 보인다.

작은 전각들에 기오헌(寄傲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옆에는 반칸짜리 건물인 운경거(韻磬居)가 보인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비켜 서고자 했던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국사를 맡기고 자신은

대리청정을 하며 후원 연경당에 들어가 쉬곤 하였다.

 

효명세자는 정조를 본받아 후원 규장각 뒷편에 작은 서재를 지어 독서처로 삼았는데 이게 "의두합"이다.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있는 건물은 8칸의 단촐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옆에있는 "운경거"는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칸 반짜리 건물이다.

 

 

 

애련지 일원이다.

크지 않은 연못에는 연이 가득하고 북쪽에 "애련정"이 있다. 

 

1692년 숙종은 후원에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섬을 쌓았고 곁에 정자를 지었다.

지금 그 섬은 없어졌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있다.

 

 

 

숙종은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자신이 연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애련정에 그 이유를 적어 놓았다.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숲길을 지나다 보면 오래 된 뽕나무도 만나게 된다.

 

 

 

 

 

존덕지에 기둥 두개를 담고있는 "관람정"

 

 

 

제일 높은곳에 위치한 "승재정"

사모지붕을 한 한칸의 승재정이다.

 

 

 

다리 건너에 "존덕정"과 " "폄우사"가 보인다.

존덕정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홍예교"이다.

 

 

 

홍예교

 

 

 

존덕정 천장 중앙에 두마리용 그림이 있다.

 

 

 

 

 

폄우사

존덕정 지나 길죽한 맞배지붕의 "폄우사"이다.

 

 

 

 

 

 

 

 

 

사대부 살림집을 궁궐에 옮긴 "연경당"이다.

 

 

 

창덕궁 후원에 일반 사대부 살림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건물이 있다.

바로 연경당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인 순조 28년에 창건했으며 "연경(演慶)"은 경사스러운 행사를 한다는 뜻이다.

 

 

 

 

 

 

 

 

 

뒤뜰에서 해설을 듣는 모습을 담아 보았다.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엄격하게 나누기 위해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 사이에

작은 담을 두었지만 건물 자체끼리는 이어져 있어 작은 문으로 드나들수 있다.

 

 

 

 

 

 

 

연경당의 화장실은..

 

 

 

연경당 정문이다. 

 

 

 

이제 관람을 마치고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한다.

 

 

 

많은 수의 계단은 아니어도 더위에 한계단, 두계단 오르다 보면

땀이 날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