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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성지순례(111)

미사강변도시에 위치한 구산성지../16년9월24일

 

                   [수원교구]                                구산 성지- 구산동성당

 <하남시 망월동 387 - 10번지 미사강변도시에 위치한>

 

 

미사 스타필드에서 쇼핑과 오찬을 하고

구산성지에 도착하니 오후5시가 넘었다.

 

한국성인 103위 성인 중 71번째 나오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

여덟 분의 순교자가 묻히신 거룩한 聖地

이곳 뒷산이 거북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 구(龜)자와 뫼 산(山)자를 써서

구산이란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낮은 돌담과 겹겹이 기와를 올려 쌓은 출입구에 들어서면

 성모마리아 상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신다.

 

 

 

 

양반의 자제로 유복한 가정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이 신앙의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群波)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만집(萬集),

문집(文集),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을 입교시켜 구산을 지금의 교우 촌으로 만들었다.

 

 

 

 

성인은 유방제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고,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고,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구산에서도 그 여파가 밀려와 그는 공소의 회장으로서

사학(天主學)의 괴수로 지목되어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곤장과 치도곤을 맞으며 배교 하라는 재판관의 강요에 아무런 굽힘없이『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라는 말로

오늘날 우리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는 그의 굳은 신앙심을 표현한 명언을 남겼다.
성인은 다시 형조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안 관장은 결국 1841년 윤 3월9일(4월29일)

그를 교수형에 처했고, 그의 나이 47세였다.

옥에 갇힌 지 2년이 지난 시기였으며,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두어져 이곳 구산 성지에 모셔졌다.
성인의 굳은 신앙심은 결국 1925년 7월 25일
로마 교황청의 시복조사를 거쳐

『한국 79위 복자』위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바오로2세에 의하여 한국 103위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서울에서,

 8인의 순교자들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신 후에

이곳 구산에 모셔졌다.

 

 

 

 

 

 

 

 

 

 

 

 

 구산성당은...

 

 

 

 

 

 

 

 

 

 

 

 

 구산성당은 1836년 공소로 시작해 1979년 성당(본당)으로 승격했다.

 올해 공소 설립 180년이 된 이 성당은 조선 후기 순교 성인 김성우 생가터에

마을 40여 가구 주민이 한강 변에서 나른 돌로 벽을 만들어 1956년 완성됐다.

 

 그러나 미사지구개발이 진행되면서  구산성지는 존치되는 반면,

성지 초입에 위치한 성당은 존치 대상에서 제외돼  철거 위기에 있다니

 

 

  

 

이곳에서 성지와함께 성당이 원형그대로 이전되어지길

염원하는 신자들의 열정이 모아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