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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있는오솔길/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

[한국전통문화의 이해, 답사기행] 봄은 오고, 동백꽃은 지고..정약용 유적지..//23년7월20일

 

 

 

모처럼 비개인 날씨인데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문자가 수신된다.

섭씨 31도인데 체감온도는 그 이상이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팔당댐에서 방수한 물이 폭포수가 되어 압권이다.

 

 

 

 

 

다산선생의 유적지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문학관을 지나면..

 

 

 

 

 

복원된 생가로 들어가 본다.

 

 

 

 

다산선생 생가의 모습(1935. 7. 16, 동아일보)

 

 

 

 

 

 

 

 

 

묘소로 오르는 입구이다.

 

 

 

이백년 세월의 바람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묘소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전경이다.

 

 

 

생가 전경도 보이고..

 

 

 

생가로 들어가 본다.

 

 

 

 

 

 

 

사랑채,"여유당"이란 당호가 걸려있다.

 

 

 

 

 

 

 

 

 

기념관은 10시부터 개방된다.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봄은 오고, 동백꽃은 지고"

 

 

 

 

 

기획을 전담한 김엘리 박사이다.

박교수님 수제자로 우리일행들에게 직접 설명을 해 주었다.

 

 

 

 

 

정약용은 가족과 생이별한 18년의 긴 귀양살이에서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칭송될 만큼 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가 1822년 회갑에 쓴 "자찬묘지명"에서 499권을 저술했다고 밝혔고,

1834년에  "열전서총목록"이라는 이름으로 저작을 한번 더 정리하면서

503권의 저작을 소개했다.

유배지에서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명이 뚫리는 고통"을 이겨 낸 결과였다.

 

 

 

             

                  "유배길에 오르다."

                  정조때부터 끊임없던 정약용에 대한 모함은, 유배로 귀결되었다.

                  정조 사후에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정적 숙청의 명분으로 천주교를 내세워

                  신유사옥(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천주교에 연루된 정약용의 집안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어졌다.

                  신유년(1801, 순조1)은 정약용에게 너무도 혹독했다.

                  초봄부터 형제들과 함께 수감되어 국문을 받았고,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각각 경상도 장기(포항지역의 옛 지명)와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형 완도군 신지면)로

                  유배되었다. 고문의 후유증이 채 완쾌되기도 전, 조카사위 황사영이 천주교 탄압의 

                  전말을 담은 편지를 중국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전하려고 한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정약용은 그와 관련한 혐의로 또 다시 정약전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형제는 태비의 특지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고, 정약전은 절해고도 흑산도로 들어가야 했다.

                  바다를 사이에 둔 유배지에서 형제는 서로를 그리워하다 끝내 죽는 날까지 만나지 못했다.

 

 

 

 

 

 

 

 

 

 

 

 

 

 

 

 

 

 

 

 

 

<회혼시>는 정약용이 회혼일을 기념하며 썼으나, 다산이 회혼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아내 홍씨와 결혼해 만 36년을 내외로 살았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나는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홍혜완의 남편"

1776년, 정약용은  고향 마재에서 15세의 나이로 혼례를 치렀다.

부인의 이름은 혜완이고, 호조좌랑 홍화보의 외동딸로 정약용보다

한 살 연상이었으며, 정약용과 60년의 풍상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정약용의 과거 공부를 위해 한양으로 이사했다.

정약용이 28세 때인 1789년(정조13)에 문과 갑과 2인으로 급제하기 전까지

부인 홍씨는 정약용을 대신해 14년여 동안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했다.

정약용이 관직에 나간 후에도 부인 홍씨는 남편 정약용을 위해 12년 여 동안 

헌신했으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후에는 고향집 마재를 지키며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건사해야만 했다.

혼인한지 30년이 된 1806년(순조 6) 겨울, 홍혜완은 유배지에서 찬 겨울을 나고 있을 

남편을 걱정하며 시로 편지를 썼다.

시집 올때 가져와 담황색으로 바랜 치마도 함께 보냈다.

정약용은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에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글을 적었고,

매화나무와 새를 그려 시집가는 딸에게 주었다. 이것이 하피첩에 얽힌 사연이다.

 

 

 

 

                 아내의 치마에 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금언을 적어 보냈다.

                 공경, 옭곧음, 정의, 방정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정다산 네 형제를 제외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최초의 세례신자인 이승훈은 막내 여동생의 남편이고,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 이벽은 첫째 정약현의 처남이다.

11명의 순교자와 3명의 성인이 이 집안에서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수레와 벽돌

 

 

 

보부상들이 지녔던 인장과 인궤

 

 

 

영조와 정조대왕의 어진도..

 

 

 

 

신앙의 태동지인 마재성지를 찾아서..

 

 

 

 

 

 

 

 

 

 

 

 

 

 

 

뒤뜰로 올라보니..

 

 

 

 

 

 

 

버섯전골로 오찬을 하고..

 

 

 

일행중 채리를 가지고 온 분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