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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들/우리가족안뜰

[고향집에서..]보령 오천항에 있는 서해수호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에서..//24년6월7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천항에 인접한 충청 수영성을 방문했다.

 

<오천면 종합안내도>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오천면은 본토와 16개 유인도와 67개 무인도 그리고 10개 법정리로 구성되며

할력 넘치게 살아가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백제시대 화이포로 불려지던 오천항은 당나라와의 교역의 교두보였으며 

조선시대왜적의 침입을 막고 세곡수송을 맡았던 조운선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충청수영을 세웠는데 서해안의 수군사령부로써 규모가 군선 140여척에 

병력이 8,400여명에 달했다. 우리나라 5개 수영군중에서 보존이 제일 잘 되었다.

 

특히 최근 복원된 수영성내 영보정은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과 이항복, 송시열등

세도가들이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찾던 주변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동백꽃 필 무렵 영화 촬영장소였다는 홍보물

 

 

 

 

 

망화문(望華門),

수영성 서문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치(Arch)형이다.

 

 

 

 

성문안으로 들어오면,

앞으로 오르는 약간 가파른 길과 진휼청과 영보정이 있는

왼쪽에 있는 낮은 계단으로 오른다.

 

 

 

아름드리 오래된 팽나무,

 

 

 

 

진휼청(賑恤廳),

조선시대의 '빈민구제기관'으로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을 구제하던 기관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사용하다 1994년 매입하여 보존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이며, 대청, 온돌방, 툇마루, 부엌등이 있다. 

 

 

 

이제 영보정으로 오르는 길에서 오천항을 조망해 본다.

오천면 시가지와 항만이 보인다.

 

 

 

 

S자형의 길을 따라가면 영보정이 나온다.

 

 

 

이러니 절경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보정은 수영성 안에 있는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짓고

계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해유시화첩,

해유시화첩은 규남 하백원(圭南 下百源, 1781-1844)선생께서 충남 보령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고, 여러 선비들이 지은 시를 함께 묶은 시화첩이다.

1841년 석성(현, 부여군 석성면)현감에 제수된 규남 선생은 토호들의 사주와

모함으로 1842년 보령으로 유배되어 1843년에 석방되었다.

유배지에 머무른 1년 정도의 기간에 보령의 많은 선비들과 교우하였다.

 

1842년 4월 15일 규남 선생은 경헌 이우명, 평천 이병중, 취죽 조순영, 국은 심사숙

조일여등과 배를 타고 송도와 안면도 사이를 지나 황학루, 영보정등을 유람하였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면 규남 선생은 그림을 그렸고 여섯 사람이 각 풍경에 시를 지어 

화첩을 만들었다.

해유시화첩속의 내용은 송호와 영보정, 황학루 그림 3점과 전서체로 쓰인 서호기관

그림 한점, 18편의 시문과 서문, 발문, 기문이 더해진 42쪽의 호접식 시화첩이다.

 

 

 

 

 

 

천상누대화증강산(天上樓臺畵中江山)이라 쓰인 편액,

높은 망루에 오르니 그림같은 강산이 펼쳐진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 14권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遊記)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세상에서 호우(湖右)의 누정이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

옛날에 내가 해미(海美)에 귀양갔을 때, 마음은 있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을묘년 가을에 나는 비로소 금정(金井)으로부터 이 정자에 오를 수 있었으니, 어찌 정자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때 기이한 것을 좋아함으로 인해 좌천되었다.

 

그러나 천하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영보정을 보고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산이 육지에 있는 것은 깍아 세운 듯 뾰족하고 잘라 놓은 듯 우뚝하지 않으면 이름이 날 수 없으나,

 갑자기 물 가운데로 들어가 섬처럼 되어 있으면 작은 언덕처럼 조그맣게 솟아오른 것이라도 기이하게

보인다. 물이 강하(江下)에서부터 바다로 흐르는 것은 부득이한 사세이므로, 비록 깊은 물이 넘실 넘실

흘러가더라도 칭찬하기에 부족하나, 갑자기 바다에서 산 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되면, 그 물결치는

흥취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이 기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마산(姑麻山)이 서쪽으로 몇십 리를 내달아 꿈뜰거리며 바다 가운데 다다랐는데, 마치 학(鶴)이

목을 길게 빼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물이 갑자기 산 속으로 들어가 호수가 된 것이다.

 

영보정은 이 산에 의지하고, 이 호수에 임해 있기 때문에 이 지방의 으뜸이 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사물은 기이하지 않으면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절도사 유공 심원(柳公心源)이

나를 위해 술을 준비했고, 태학생(太學生) 신공 종수(申公宗洙)는 시인인데, 그와 함께 가을 달밤을 맞아 

고마호에 배를 띄웠다가 길을 바꾸어 한산사(寒山寺) 아래에 배를 대었다.

여기에는 또 노래하는 사람과 피리 부는 사람이 있어 그들과 더불어 절의 누대에 올라 좋은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나는 귀양 온 사람이므로,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저 하늘 한쪽에 계시는 임금을 우러러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 마음 또한 여기에 같이 기록하여 영보정기(永保亭記)로 한다.

 

 

 

동생과 같이 여행하면서 한장면을 담았다.

 

 

 

두그루의 해송,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속에 있는 나무와 흡사하다.

해풍에도 버티며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영보정을 더욱 아름답게 

받쳐주고 있는것 같다.

 

 

 

영보정에서 본 오천항